투표와 경제 ‘이웃의 담장’

조계완 기자 2024. 3. 1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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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미국 대선 때 빌 클린턴 캠프에서 선거전략가로 활동한 제임스 카빌이 고안한 유명한 선거운동 표어다.

페어는 이미 1978년에 쓴 논문 '경제 이벤트가 대선에 미치는 영향'에서부터 계량통계모델을 동원해 1916년 이후의 미국 대선 결과를 높은 정확도로 실증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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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 인사이트 _ Economy insight
조계완의 글로벌 경제와 사회
2024년 4월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국내 정치권·학계에서 ‘경제성과가 선거 결과에 지배적 영향을 미친다’는 레이 페어 미국 예일대학교 경제학 교수의 선거예측모형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2024년 2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총선 종합상황실에 예비후보자 등록 현황이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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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예일대학교 경제학 교수 레이 페어가 2002년에 펴낸 책 <미국 대선 예측>(Predicting Presidential Elections)의 첫 장 제목은 “It's the economy, stupid.”(경제가 문제야, 이 바보야)이다. 1992년 미국 대선 때 빌 클린턴 캠프에서 선거전략가로 활동한 제임스 카빌이 고안한 유명한 선거운동 표어다. 페어는 이미 1978년에 쓴 논문 ‘경제 이벤트가 대선에 미치는 영향’에서부터 계량통계모델을 동원해 1916년 이후의 미국 대선 결과를 높은 정확도로 실증 기술했다. 이 모형에 들어가는 핵심 설명변수는 6가지인데, 3개는 정치변수이고 나머지 3개는 경제변수(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 최근 수년간 분기별 성장률, 물가상승률)다.

2024년 4월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국내 정치권·학계에서 페어 교수의 선거예측모형이 새삼 주목받는다고 한다. 이 모델이 총선 결과를 수정구슬처럼 미리 알려줄 능력을 품고 있는지는 제쳐 두고, 경제성과가 선거 결과에 지배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약 20차례의 역대 미국 대선으로 입증했다는 점만 기억하자. 전통적으로 경제와 정치를 둘러싼 학술적 관심은 페어의 접근과는 사뭇 다르게, 둘 사이의 근본적인 긴장과 모순을 해명하거나 화해를 모색해왔다. 이 둘은 근대의 발명품이지만 서로 상충하는 지배 원리를 따른다. 민주주의는 어떤 사회체제를 선택할지를 놓고 동등한 비중(1인 1표)을 지닌 시민들의 참여를,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유와 자유로운 처분 및 시장을 통한 가격 결정과 자원 배분을 특징으로 한다. 정치가 평등 가치가 지배하는 민주주의 영역이라면 시장은 강자의 지배 원리가 작동하는 세계라서, 민주주의가 시장자본주의를 붕괴시키거나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손상할 우려가 항상 존재한다.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미국 뉴욕대 교수)는 1980년대에 이렇게 말했다. “개인들은 시장적 행위자이면서 동시에 시민이다. 그런데 시민으로서 선호하는 자원 배분은 시장을 통해 도달하는 배분과 일반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시장은 자신이 소유한 자원을 가지고 배분을 위한 표를 던지는 메커니즘이며, 자원이 항상 불평등하게 분배된다. 반면에 국가는 시장 결과와는 다르게 분배할 수 있는 효과적인 권리와 집행수단을 무기로 삼아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자원을 배분·할당하는 체제이다.”

당연히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본주의 사이의 모순과 양립, 또는 상호보완적인 조합의 가능성은 근대 사회과학 연구의 주요 주제였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서로를 필요로 하거나 이 둘이 공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제기된 것이 이른바 ‘민주자본주의’로, 계급타협 또는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제기돼왔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담장을 고치며’(1914년)라는 시에서 “(농사에서) 튼튼하고 좋은 울타리는 좋은 이웃을 만들지만, 울타리의 경계선에 너무 가깝게 골을 파게 되면 이웃 관계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했다. 둘 사이 구획선에까지 서로가 개입하면 이제 정치가 경제를 혼돈에 빠뜨리거나 경제가 정치를 요동치게 만든다(페어 교수)는 하나의 비유로 삼을 만도 하다.

시장은 개인을, 정치는 집단을 대표한다. 경제변수가 경제모형 안에서 함수관계에 의해 어떤 균형 상태로 점차 조정돼가는 ‘결정’을 특성으로 한다면, 정치 과정은 집단·계급·세력·이해관계자들 간의 갈등과 투쟁, 타협을 원리로 하면서 각종 제도가 형성·수정·변경·폐기되는 ‘미결정 및 불확정’의 영역이다. 여기서 경제성과가 투영된 투표용지는 ‘종이돌멩이’가 된다.

한겨레 선임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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