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마시고 사랑에 취하다[음담패설 飮啖稗說]

박경은 기자 2024. 3. 9.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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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와인(잔)은 섹시하다

소위 ‘로맨틱한 작업’을 할 때 가장 어울리는 술은 뭘까. 시큼털털한 막걸리나 강하고 거친 보드카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게다. 경우에 따라 ‘작업’에 방점을 둔다면 테킬라를 꼽을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와인 아닐까. 와인은 ‘남녀상열지사’에 가장 어울리는 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사에서 최고의 멜로 드라마로 꼽히는 <카사블랑카>에서 험프리 보가트는 잉그리드 버그먼에게 다음과 같이 속삭인다. “그대 눈동자에 건배!”(Here’s looking at you, kid). 지금도 회자되는 이 명대사가 나온 장면에는 스파클링 와인의 일종인 샴페인 ‘멈 코르동 루즈’가 함께했다. 작품에 등장한 또 다른 샴페인 ‘뵈브 클리코’도 중요한 사랑의 매개체였다.

10여년 전 세간의 화제가 됐던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 파격적·변태적 섹스를 앞둔 두 주인공의 정서적 친밀감을 달군 것은 화이트 와인 ‘푸이 퓌메’였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여러 와인은 그레이와 같은 상류층 남자의 섹시하고 치명적 매력을 보여주는 장치로 사용됐다. 영화 <하녀>에서 훈(이정재)이 주요한 장면마다 들고 있던 와인은 굴복할 수밖에 없는 힘과 유혹의 상징으로 작용했다. 원초적 욕망에 달뜬 커플과 욕조, 와인. 이 조합이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일일이 꼽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다. 그만큼 와인은 다양한 콘텐츠에서 성적 욕망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대 눈동자에 건배!” 카사블랑카·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성적 욕망 표현하는 수단으로써 등장한 영화 속 와인처럼
와인잔에도 성적인 의미가 다분히 담겨 있다
“최초의 포도주잔 원형은 헬레네의 유방”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의 ‘님프들과 사티로스’(Nymphs and a Satyr). 목욕하는 자신들을 염탐하던 사티로스를 물가로 끌고 가 빠뜨리려 하는 님프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위키피디아

실제로 와인은 섹스에 도움이 될까. 어느 술을 막론하고 과도한 음주는 성적 교감과는 거리가 멀다. 자칫 주폭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과도하고 상습적인 음주가 발기부전이나 조루증을 야기한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적정량’(하루에 1~2잔 정도)에 한해 와인이 성 건강을 높여 섹스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 결과는 꽤 있다.

지난해 임상의학저널(Journal of Clinical Medicine)이 발표한 ‘레드 와인과 성기능’에 관한 보고서를 보면 적당한 용량의 레드 와인은 남성의 발기부전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남녀 모두의 성욕 및 성 기능을 향상시키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의 영양학자 우마 나이두는 <미라클 브레인 푸드>에서 “레드 와인이 남성의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증가시키고 발기부전을 감소시킨다는 점을 입증한 연구도 있다”면서 “적당량 마시면 오히려 성욕을 돋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내용의 연구 결과나 이를 보도한 기사들은 손쉽게 검색할 수 있다. 미국의 경제뉴스 전문 매체인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레드 와인이야말로 성감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유일한 알코올음료라고 쓰기도 했다.

술. 사람들과 어울려 식탁에서 즐겁게 마시고 흥을 돋우는 데 도움을 주는 알코올 음료. 수많은 술 중 유독 와인은 그 존재감이 남다르다. 오랫동안 상찬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범접할 수 없는 ‘오라’(aura)를 지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신의 물방울이자 인간 욕망의 정수. 아마도 인류의 문명사와 함께했던 동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술을 담아 마셨던 잔 마스토스. 위키피디아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대홍수 이후 살아남은 노아가 가족들과 새 땅에 심은 것은 포도나무였다. 신약성서에서 와인은 예수의 피로 비유되고 있으니 이만한 절대 권위를 부여받은 음료가 또 있을까.

그리스 신화에서 와인을 상징하는 존재는 디오니소스(로마 신화에서 바쿠스)다. 그가 가는 곳에는 포도나무가 심어졌고 양조법이 전해졌다. 그는 와인과 쾌락, 다산의 신이었고 이 같은 요소들은 성적인 욕망과 분리될 수 없다. 디오니소스를 추종했던 사티로스(반인반수의 정령)와 님프(아리따운 여성의 모습을 한 정령)는 르네상스 시대 이래 많은 예술가들의 손을 통해 욕망의 존재로 구현됐다. 이들은 엇갈린 구애와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이기도 했으며 쾌락과 정염의 화신이었다. 사랑을 갈망했던 존재이기 때문일까. 성적 욕구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증세를 가진 사람을 지칭해 남성은 ‘사티리어시스’(satyriasis), 여성은 ‘님포마니아’(nymphomania)라고 한다.

‘플루트’(왼쪽), ‘쿠프’

와인잔에도 성적인 의미가 다분히 담겨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서 주인공 에밀리는 양조장 아들 티모테와 단둘이 샴페인을 마신다. 티모테가 건넨 잔은 길쭉한 샴페인잔 ‘플루트’가 아니라 둥글넓적한 ‘쿠프’다. 에밀리가 묻는다. “샴페인은 플루트 잔에 마시는 거 아니에요?” 티모테는 답한다. “쿠프 잔이 섹시해요.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슴을 본뜬 잔이거든요.” 에밀리는 잔을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대본다. 그러자 티모테의 손도 에밀리의 왼쪽 가슴에 가 닿는다.

앙투아네트의 가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샴페인잔에 관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세간에 통설처럼 퍼져왔으나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사랑하는 여성의 가슴 모양을 따라 와인잔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이전에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된 와인잔 ‘마스토스’(mastos)는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의 가슴 모양을 본떴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마스토스의 바닥에는 마치 유두처럼 생긴 돌기도 있어 전체적으로 여성의 가슴 모양을 떠올리게 한다. 16세기 프랑스 왕 앙리 2세는 20세 연상의 애첩 디안 드 푸아티에의 가슴을 본떠 자신의 전용 와인잔을 만들었다. 앙리 2세의 부인은 이탈리아 메디치가문의 딸인 카트린 드 메디치다. 미국의 역사학자 매릴린 옐롬은 <유방의 역사>에서 “고대 그리스 전통은 최초의 포도주잔을 만들면서 그 원형을 헬레네의 유방에서 찾았다”고 썼다.

실제로 유명 스타의 가슴 모양을 본떠 와인잔을 만든 사례는 현대에도 있었다. 2008년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모델 클라우디아 시퍼의 가슴 모양을 본떠 샴페인 돔 페리뇽 잔을 디자인했다. 2014년엔 영국 슈퍼모델 케이트 모스의 데뷔 25주년을 기념해 그의 왼쪽 가슴을 본뜬 쿠프 잔이 제작됐다. 이 작업에는 프로이트의 증손녀인 조각가 제인 맥아담 프로이트가 참여했다.

와인만큼 문화적 숭상의 대상으로 자리 잡은 건 아니지만 사실 다른 술이라고 장구한 사연이 없는 건 아니다. 긴장을 풀어주고 기분을 살짝 돋워주는 알코올 음료에는 나름의 미덕이 있다. 어색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푸는데도, 마음 가는 상대에게 용기를 내 고백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날 선 이성이 느슨해진 틈을 뚫고 색다른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일명 ‘비어 고글’(beer goggles) 현상이다. 이는 술을 마시면 상대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한마디로 음주 후에 눈에 콩깍지가 쓰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비어’ 자리에 와인이든 막걸리든 보드카든 소주든 어떤 술을 넣더라도 그 의미는 같을 것이다. 주의하자. 암만 콩깍지가 씐다 하더라도 ‘비어 고글’이 모든 걸 뚝딱 해결해주는 도깨비방망이가 될 수는 없다. 전혀 호감 없던 사람에게 갑자기 호감이 생기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해 8월 영국 가디언 등 외신에선 이를 뒷받침하는 보도가 나왔다. 미국 스탠퍼드대 예방연구센터와 피츠버그대 공동 연구팀이 실험한 결과를 한마디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술이 사람을 더 멋지게 보이도록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매력적인 사람에게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술김에….’ 관계의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룰 수도 있다는 기대감도 생긴다. 하지만 명심, 또 명심하고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한다. ‘술김에…’ 하다가 인생 ‘골로 갈’ 수도 있다.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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