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 영화의 허리를 끊었다, 파묘
*이 글은 영화 <파묘>의 주요 장면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영화 <파묘>가 영화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세상이 될 것”이라는 그 옛날의 예언처럼, <파묘>는 세상이 돼버린 영화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어쩌면 영화 자체가 이런 마술의 기법일 것이다. 저명한 종교학자 리 시걸에 따르면, 우리 모두가 바보일 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위대한 마술의 기능이다. 우리의 인지능력과 사고 작용 자체가 우리를 혼란으로 이끈다는 진실을 마술은 보여준다. 말하자면,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이런 마술의 효과에 따른 것이다.
딜레마를 내포한 형식 구조
이 지점에 <파묘>의 딜레마가 있다. 이른바 오컬트 장르물에 속한다는 이 영화는 그 내용의 진위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 중이다. 진정 이 영화의 정체성이 오컬트 장르물이라면, 영화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허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 영화는 더는 오컬트 장르물의 논리에 갇혀 있을 수 없다. 이 마술의 효과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셈이다. 내 생각에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진리는 이야기의 진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이런 딜레마를 내포한 형식의 구조에 있다.
구조는 언제나 증상을 생산한다. 이 증상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증상에 대한 방어 자체를 절실한 쾌락으로 만들어낸다. <파묘>를 둘러싼 많은 논의를 보고 있으면 이런 회로의 순환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정작 이 많은 논의는 영화 자체는 괄호 안에 넣어두고, 그 영화가 참조한 외부의 소재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까닭에 이 영화를 “성공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크게 틀린 진단이 아니다. 어쨌든 영화는 세상이 돼야 하고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파묘>는 세상이 됐다. 물론 실증주의자들은 반대로 이야기하겠지만, 실상은 같은 말이다. 세상은 이미 <파묘>와 같기에 이런 영화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논리가 맞고도 틀리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논리가 서로에게 더 나쁠 것이다. <파묘>에 대한 논의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지고 피도 눈물도 없는 현실이 그 자리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파묘>가 어려운 한국 영화 시장에 다시 불을 지필 것이라거나, <파묘>는 이념적으로 편향된 좌파 영화라거나, <파묘>는 21세기에 덜 떨어진 미신을 조장하는 시대착오적인 영화라거나, <파묘>는 한국 오컬트 장르를 한 단계 끌어올린 명작이라거나….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파묘>를 둘러싼 논란은 전혀 새롭지 않다. 요즘 세대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인 대다수가 거의 사실로 믿었던 어떤 “신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본이 한반도를 영구 식민지화하기 위해, 또는 큰 인물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해 호랑이 형세를 한 한반도의 혈맥 곳곳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것이다. “신화”의 세계를 벗어나기 힘들어 보이는 이런 가설은 1990년대 문민정부가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쇠말뚝 뽑기를 국가의 주요 사업으로 공식화하면서 현실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식민지 근대화론자인 이영훈부터 민족주의자인 이이화까지 정치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하는 양쪽 모두에 의해 “쇠말뚝 음모론”은 현실성 없는 “괴담”으로 기각됐다.
‘쇠말뚝 가설’은 괴담이라 판명 났어도
<파묘>는 바로 “쇠말뚝 음모론”이 “괴담”으로 판명 난 이 지점에서 가능하다. “쇠말뚝 가설”이 진짜였다면 <파묘> 같은 영화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 오컬트야말로 현실에서 허무맹랑한 것으로 여겨지는 소재를 다룰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장재현 감독이 진정 쇠말뚝 이야기를 사실로 믿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랬다면 오컬트가 아니라 <건국 전쟁> 같은 역사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감독은 이 문제에 명확하지 않은 태도를 취했다. 감독도 자신이 한 인터뷰에서 인정했지만, 딱히 “오컬트 장인의 솜씨”에 들어맞지 않는 장르의 단절이 영화 내적 논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완전하게 오컬트 장르의 논리에 충실한 영화도 아닌 셈이다. 후반부로 가면서 <파묘>는 오컬트적인 자기 정체성을 지양하고 다른 장르로 변신한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가 의도한 장르 전환이 영화 바깥의 이야기를 무성하게 만들어준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장재현 감독이 “영화의 허리”를 끊었고, 그 끊어진 영화의 허리는 쇠말뚝으로 한반도의 허리가 끊겼다는 현실의 음모론을 다시 소환한 것이다. 이렇게 <파묘>는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 자체가 바로 마술의 기법인 셈이다. 그러나 마술은 마술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마술은 우리 모두가 속임수 따위에 쉽게 넘어가는 바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근대 한국의 쾌락 원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절대적 평등주의, 나의 용어법으로 명명하자면 쾌락의 평등주의가 <파묘>의 마술에서도 여지없이 작동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무속이 유행하는 까닭도 바로 이런 쾌락의 평등주의 때문이다. 모든 것이 운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면, 어떤 이들이 누리는 좋은 것들도 노력보다는 행운의 결과이다. 부자도, 수재도, 선남선녀도, 모두 운이라고 믿으면 나의 불행이나 비참은 상대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 운칠기삼이란 말은 이런 쾌락의 평등주의를 잘 설명해주는 격언이자 또한 근대 자본주의가 초래한 거대 변화의 물결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한국인들의 윤리다. 말하자면, 이 절대적 평등의 이념은 한국이라는 국가 장치가 주체를 생산하는 원리다. 이 주체는 거세에 복종함으로써 “국민”이 되지만, 그 결과 거부하기 힘든 욕망의 법칙을 내재하게 된다. 이 욕망의 법칙이 바로 자본주의다.
<파묘>는 이런 의미에서 “한국인은 어떻게 한국인이 됐는가”라는 동어반복적 질문에 대한 훌륭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장르의 논리에 주목하지 않고 그 소재만이 논란이라는 점에서 영화로서 <파묘>는 불행하지만, 그렇기에 <파묘>는 현실이 될 수 있었다. <파묘>는 확실히 한국인의 영화이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풍수를 믿는 지관과 기독교인 장의사, 그리고 할머니 몸주신을 모시는 무속인으로 이뤄졌다. 나중에 잠깐 스님도 등장한다.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육화이다. 이들 등장인물은 세상의 비밀을 이해하고 있는 현자다.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은 미국으로 대변되는 전후 체제의 필연성이다. 냉전을 상징하는 북위 38도선상에 묻혀 있는 일본 정령은 한국의 혈맥을 끊으려 여우가 숨겨놓은 역사의 비밀이다.
‘한국인’ 정체성 형성과 반일주의
역사적 사실에 비춰보면 이런 이야기 전개는 뒤죽박죽이고, 오히려 분단의 책임 소재를 불명확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 장면을 두고 식민지 체제가 분단 체제로 이어진 역사적 사실을 환기하려는 시도라고 둘러댈 수도 있겠지만, 굳이 해석이 이 정도까지 비약할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처럼 <파묘>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형식의 내적 논리를 통해 완성되지 않고 계속 스스로 대체 보충돼야 한다. 이런 반복적 자기 보충이 텍스트의 운명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방식으로 <파묘>는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만들어주는 기원에서 무한 반복의 반일주의가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이영훈 같은 이들은 이런 반복의 구조 자체를 “미개”라고 규정하지만, 딱히 그렇진 않다.
예를 들어 <파묘>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듄: 파트2>를 보자. 현란한 스펙터클과 웅장한 스케일을 자랑하지만, 이야기는 따지고 보면 결국 오늘의 미국을 만든 제2차 세계대전이다. 한국의 기원에 일본 제국주의가 있다면, 미국의 기원에 나치가 있다. 아무리 거창한 이야기처럼 보여도 그 구조는 하나로 수렴한다. 호모 사피엔스 이래로 우리 인류의 사고방식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신화에서 종교로, 그리고 과학으로 양태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과거 신화의 세계에서 우리 조상이 최초로 품었을 그 생각이다. 이런 세계사의 전개에서 문명과 미개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아마존의 부족과 서울의 회사원이 욕망하는 대상은 다를지라도 그 방식은 동일하다.
이런 의미에서 <파묘>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그 기원적 구조를 훌륭하게 드러낸다. 아무리 발달한 자본주의를 건설했더라도, 아무리 전후 체제의 수혜자로 승승장구했더라도 결국 한국인을 한국인이게 하는 것은 반일주의다. 이 필연성의 구조야말로 일본 제국주의가 박아놓은 쇠말뚝일 것이다. 이런 까닭에 쇠말뚝은 억압된 것의 귀환이 아니라 거세 공포에 대한 환기다. 쇠말뚝은 일본 제국주의로 인해 상실했다고 여겨지는 거세된 민족의 징표이다. 쇠말뚝은 완전한 절단을 의미하지 않는다. 혈맥을 완전히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일부를 눌러서 전체를 옭아매는 것이 쇠말뚝의 기능이다. 이런 의미에서 쇠말뚝은 부분을 절취함으로써 거세의 효과를 발휘한다. 거세로 얻어지는 효과는 민족이라는 법의 정립이다.
이 흥행이 한국 영화계에 희소식일까
<파묘>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거세에 대한 저항이 아니다. 사실 민족 자체가 거세로 인한 금지의 결과물이다. 만일 <파묘>가 욕망의 법칙을 넘어서려 했다면 장재현의 영화는 세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욕망의 법칙을 넘어선 금지된 것들에 대한 궁금증을 보여주는 것은 장재현 감독의 전작들이다. 그러나 <파묘>는 그 궁금증을 버리고 법의 금지에 충실하려 했다. <파묘>의 흥행이 저조한 한국 영화산업에 희망이 될 거라는 소리가 들린다. 연일 관객 수가 얼마라는 집계가 언론을 오르내린다. 그러나 영화보다 더 영화처럼 돼버린 이 세계에서 과연 이 세상과 다름없어진 영화가 한국 영화에 희소식일 수 있을까. 오히려 이제는 세상이 되지 않는, 또는 될 수 없는 영화가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부디 내 생각이 틀렸기를 바란다.
이택광 문화비평가·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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