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당일치기 인기 여행지 벨렝지구/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제로니무스 수도원 마누엘 양식 걸작/산타 마리아 성당엔 바스쿠 다가마 잠들어/포르투갈 대항해 역사·인물 담긴 발견기념탑도 웅장/‘테주강의 귀부인’ 벨렝탑 테라스 오르면 아름다운 풍경 파노라마로
포르투갈 범선 캐러벨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무리의 맨 앞에 선 엔히크 항해왕자. 대서양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결연하다. 뒤를 따르는 바스쿠 다가마와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얼굴에도 기나긴 탐험을 완성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와 열망이 가득하다. 리스본의 젖줄 테주강이 흘러 흘러 망망대해 대서양과 만나는 리스본의 서쪽 끝자락, 벨렝지구에 섰다. 포르투갈 대항해를 이끈 선구자 33인이 새겨진 발견기념탑에는 대항해 시대의 역사가 지금도 살아 꿈틀댄다.
◆마누엘 양식 걸작 제로니무스 수도원
포르투갈 리스본은 여행자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다. 물가도 저렴한 데다 걸어서 다녀도 충분할 정도로 주요 명소가 몰려 있어서다. 구도심을 샅샅이 훑었다면 이제 슬슬 리스본 외곽으로 눈길을 돌릴 차례. 대표적인 당일치기 여행지가 대항해 시대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벨렝지구다. 많은 탐험가가 새 항로를 개척하고 미지의 대륙을 찾아 기약 없는 험난한 대장정에 나설 때 출발점이 됐던 곳이 바로 테주강이 끝나고 대서양이 시작되는 벨렝지구다.
리스본 외곽이지만 그리 멀지 않다. 다양한 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데 피게이라 광장에서 출발하는 15E 트램을 추천한다. 리스보아 카드를 활용하면 무료이고 40분이면 벨렝지구에 닿는다.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출발한다면 15E 트램과 728번 버스를 모두 이용할 수 있고 버스가 10분 정도 더 빠르다. 여행인데 조금 늦는다고 무슨 일 있을까. 느긋한 마음으로 깔끔한 최신형 트램에 올라타니 적당한 속도로 달리며 아름다운 테주강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눈앞에 펼쳐 보인다. 4월25일 다리와 구세주 그리스도상을 지나 아줄레주 타일 장식이 예쁜 건물들을 구경하다 보면 지루할 틈도 없이 벨렝지구에 닿는다.
여행자들이 우르르 내리는 곳은 벨렝지구 여행이 시작되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이다. 건물 길이만 300m에 달하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입장료는 10유로이지만 리스보아 카드를 준비하면 무료로 빠르게 입장할 수 있다. 수도원 전체 규모는 엄청나다. 하지만 여행자들에게 개방된 곳은 예쁜 정원이 딸린 2층 구조의 사각형 회랑. 그래도 마누엘 양식의 걸작답게 천장이 높은 회랑을 거니는 것만으로 감탄이 쏟아진다. 어찌 이리 화려하고 정교할까. 고딕양식을 기초로 대항해시대를 상징하는 조개 등 해양생물, 동식물, 산호, 밧줄, 십자가, 천체 등을 상징적인 모티브로 사용해 벽, 기둥, 천장을 장식했는데 마치 살아 숨 쉬는 듯 생생하다. 아치형 마누엘 양식 기둥을 배경으로 서면 아름다운 인생샷을 얻는다.
수도원은 이탈리아, 스페인, 플랑드르 디자인이 섞인 걸작으로 평가돼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1498년 인도 항로를 개척한 바스쿠 다가마의 성공을 기리기 위해 마누엘 1세 국왕의 지시로 1502년에 착공한 수도원은 무려 170년이 걸려 1672년에야 완공됐다니 대단한 집념이다. 벨렝지구는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때 피해를 전혀 보지 않아 이처럼 건물이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다.
수도원 동쪽 건물은 산타 마리아 성당으로 무료입장이다. 이곳을 꼭 들러야 하는 이유가 있다. 바스쿠 다가마가 바로 여기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입구 왼쪽에 사자 여섯 마리가 받치고 있는 석관 위에 두 손을 가슴 위에 가지런히 모은 바스쿠 다가마의 석상이 누워 있다. 그는 인도 항로 개척에 나서기 전에 이 성당에서 성공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린 것으로 전해진다. 석관 인근에는 밧줄을 잡은 그의 손이 조각돼 있는데 만지면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고 행운도 깃든다니 조심스레 쓰다듬어본다. 맞은편 석관에는 포르투갈의 유명 시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가 안치돼 있다. 성당에는 성 제로니무스의 유화와 화려한 장식으로 꾸민 6개의 기둥 등 볼거리가 많다.
◆대항해 시대를 만나는 발견기념탑
성당을 나서 바스쿠 다가마 정원과 임페리우 광장을 가로질러 테주강 쪽으로 다가가면 거대한 십자가 모양의 칼이 조각된 발견기념탑이 푸른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다. 엔히케 항해왕자 사후 500주년을 기념해 1960년에 완공된 이 탑은 대항해 시대의 영광과 애달픈 사연을 추억하는 리스본 사람들의 향수를 잔뜩 담고 있다. 맨 앞에 범선을 든 엔히케 왕자 뒤로 동서쪽 양면에 16명씩 모두 33명이 조각됐다. 바스쿠 다가마,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페르디난드 마젤란, 브라질을 발견한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 최초로 희망봉을 항해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와 시인 카몽이스, 선교사, 지도제작자, 수학자, 항해사 등이 주인공이다. 발견기념탑을 세운 자리가 바스쿠 다가마가 대항해를 떠난 자리다.
앤히케 왕자가 범선을 들고 있는 이유가 있다. 그는 포르투갈 남부 알가르베의 라고스 항구를 기지로 삼아 아랍인이 사용하는 다우선을 토대로 포르투갈식 범선 캐러벨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기존 선박은 잔잔한 지중해에서 노를 젓는 방식이었는데 이는 대서양의 폭풍과 파도에 맞서야 하는 원양 항해용 선박과는 맞지 않았다. 이에 엔히케 왕자는 삼각돛 세 개를 달아 역풍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고안한 범선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의 범선 덕분에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비스 왕조의 시조 주앙 1세의 셋째 아들인 엔히케는 아프리카 서해안에 많은 탐사선을 보내 나중에 인도 항로를 개발하는 초석을 닦았다. 발견탑에는 십자가 모양 칼을 디자인해 먼 항해를 떠난 이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던 가족들의 염원을 표현했다. 발견탑 앞바닥에는 ‘바람의 장미’로 불리는 거대한 나침반 모양의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포르투갈이 지배한 나라마다 식민지로 삼은 연도가 적혀 있다.
◆‘테주강의 귀부인’ 벨렝탑
벨렝지구 여행은 벨렝탑에서 정점을 찍는다. 발견기념탑에서 테주강을 즐기며 서쪽으로 15분 정도 걸으면 ‘테주강의 귀부인’이란 별명을 지닌 벨렝탑을 만난다. 하얀 탑의 모양이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을 닮아 이런 애칭을 얻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말 그대로 고혹적인 자태의 귀부인이 넓은 치마폭을 테주강에 살포시 드리운 듯하다. 끊임없이 반복되던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이 모두 담긴 곳이다. 대항해를 떠나는 배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보는 리스본 건물이 벨렝탑이었고 오랜 항해 끝에 무사히 귀환하는 아버지와 아들을 가족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맞이하던 곳도 벨렝탑이다.
성수기가 아닌데도 줄이 아주 길다. 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이 제한돼 나오는 인원만큼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전에 벨렝지구 ‘오픈런’ 때 대부분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선택하는데 벨렝탑을 먼저 찾으면 입장 시간을 줄일 수 있겠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입장이 비교적 여유롭기 때문이다. 무료인 리스보아 카드만 믿고 줄을 섰다가는 큰 낭패를 당한다. 벨렝탑 공원 매표소에서 리스보아 카드를 제시하고 종이 입장 티켓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 시간을 기다려 벨렝탑 안으로 들어서자 박물관으로 쓰이는 1층에 대포가 곳곳에 놓였다. 벨렝탑이 리스본의 중요한 방어 시설로 활용된 흔적이다.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은 해상 무역과 식민지 확장으로 큰 부를 축적했다. 특히 리스본이 유럽의 중요한 항구 도시로 발전하자 테주강 하구를 방어하고 해상무역을 통제하는 한편, 포르투갈의 위상을 보여주기 위해 마누엘 1세 때인 1515년에 착공해 1521년 벨렝탑을 완공했다.
1580년 스페인의 침략 때도 벨렝탑은 포르투갈의 방어선을 지키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고 포르투갈 왕실의 거주지로도 사용됐다. 2층에 왕의 방이 잘 보존돼 있고 4층은 예배당이다. 1층 바닥에 보이는 쇠창살은 ‘물고문’을 하던 무시무시한 지하감옥. 스페인에 지배당하던 시절 주로 정치범과 독립운동가들을 가두던 곳으로 만조 때는 목만 남기고 물에 잠길 정도로 뚫린 구멍으로 물이 들어와 수용자들은 매일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빛이 들어오는 계단을 따라 오르면 벨렝탑의 2층 테라스로 이어진다. 밖으로 나서는 순간 대서양과 이어지는 테주강의 아름다운 물길이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준다. 테라스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지금도 바다를 바라보며 항해에 나선 이들의 안전을 기원한다. 먼바다로 떠나는 한 무리의 요트와 그 위를 자유롭게 나는 갈매기, 그리고 어느덧 뉘엿뉘엿 떨어지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의 붉은 햇살이 벨렝지구 여행의 낭만을 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