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왜 눈물나?” 사람 울린 ‘들짐승’의 흔적…가위로 뭘하나했더니[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동행하는 작품>
이카루스
춤
왕의 슬픔 동행하는>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는 이제 한물간 노인처럼 여겨졌다.
한때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와 어깨를 나란히 한 그는, 어느새 늙고 병든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십이지장 암이었다. 1941년, 일흔두 살에 맞닥뜨린 치명적인 병이었다. 목숨을 건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그의 몸은 온갖 후유증에 또 엉망이었다. 가장 괴로운 건 관절염이었다. 관절이 울어대는 통에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통증이 심해지는 날에는 새끼손가락 하나도 마음껏 놀리지 못했다. 마티스는 평범한 삶을 되찾기가 어려워보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틈틈이 기회를 엿보는 사신(死神)을 기다리는 일밖에 없는 듯했다.
이러한 처지에 놓인 사람치곤 마티스의 얼굴색이 영 어둡지만은 않았다.
마티스는 자신의 몰락을 믿지 않았다. 그는 예술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마티스는 힘 빠진 손가락에 붓을 묶어버렸다. 그 상태로 휠체어에 탄 채 캔버스와 마주했다. 주치의의 호소가 없었다면 또 남은 평생을 이러고 있을 요량이었다. 약해진 폐가 물감 탓에 더 악화할 수 있다는 말이 겨우 고집을 꺾을 수 있었다. 마티스는 다시 침대에 갇혀있었다. 그는 또 무슨 꿍꿍이를 생각하는지, 잠시도 몸을 가만히 두질 못했다. 얼마 안 돼 마티스는 조수를 불렀다. 조용하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붓은 됐고, 가위 한 쌍을 들고 오게."
마티스는 이제 가위로 색종이를 오리고 있었다.
마티스는 진지했다. 이건 시간 죽이기가 아닌 진지한 창작 활동이었다. 그는 붓을 쥐듯 가위를 쥐었다. 물감을 대하듯 색종이를 대했다. 여전히 침대 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작업실 한가운데 있었다. 마티스는 가위질을 할 때는 통증도 잊었다. 원하는 대로 죽죽 자른 조각을 캔버스에 붙이는 건 붓질 못지않은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가위로 그림을 그리는 독특한 방법을 개발하고 스스로 체화(體化)했다. 그의 후기 걸작 〈이카루스〉 또한 이런 방식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카루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왕에게 밉보여 미궁에 갇힌 그는 떨어진 새 깃털을 모은다. 밀랍으로 이를 엮어 날개를 만든 뒤 그곳에서 탈출한다. 성공의 기쁨에 취한 그는 태양을 향해 더 세게 날갯짓을 한다. 뜨거운 햇빛이 밀랍을 녹이기 시작한다. 이를 알았을 땐 이미 너무 늦고 말았다. 거듭 휘청하던 그는 결국 바다에 빠져 허무하게 죽고 만다.
마티스는 색종이로 이카루스의 추락 장면을 표현했다.
구성은 단순했다. 인간 형태를 한 검은색은 이카루스, 배경의 파란색은 하늘과 바다, 노란색 별 모양은 깃털이었다. 신화를 빼고 이 그림만 보면 이카루스는 외려 기쁨의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파란색은 은은한 조명 같고, 노란색은 폭죽 내지 카메라 플래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카루스의 가슴에 박힌 새빨간 심장은 펄펄 뛰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마티스는 자기 처지를 이카루스에 대입했다. 이카루스는 날개를 잃은 채 추락하고 있고, 마티스는 붓을 쥘 힘을 잃은 채 몰락하고 있다. 그런데, 이카루스는 하릴없이 물에 빠졌다고 해서 삶을 포기해만 했을까. 망가진 날개를 미련 없이 내버린 후 곧장 두 팔로 헤엄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신화 속 이카루스가 만약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면, 그는 작품 〈이카루스〉 속 모습처럼 여전히 생의 의지를 품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찬가지였다.
늙고 병들어 붓질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예술을 그만둬야 하는가. 아니었다. 붓을 버리고 다른 도구를 찾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간 없던 기법을 연구해 다시 길을 개척하면 될 것이었다. 마티스에게는 그게 가위로 색종이를 오려 붙이는 일이었다. 이는 소박하면서도 추상적인 새로운 방식이었다. 〈이카루스〉는 그의 결기를 담은 일종의 선언이었다. 그는 그렇게 물에 빠져 죽지 않고 그곳에서 헤엄치는 길을 택했다.
마티스에게 예술은 사랑이자 종교였다.
그는 작은 스케치 한 점에도 심혈을 기울이는, 대작에 임할 때는 꼭 정장을 입고 등장하는 사내였다. 창작의 모든 순간에 정열을 쏟아붓는 사람이었다. 사랑에 빠진 이가 그렇듯 마티스는 예술만 생각했다. 종교에 심취한 이가 그렇듯 마티스는 예술만 얘기했다. 그만큼 늘 진심이었다. 그런 마티스에게 주변의 질시, 세월이 안기는 역경 따위는 예술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것은 모두 도전 과제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더 아름다운 결과물을 빚어내기에 앞서 겪어야 할 서사(敍事)의 재료일 뿐이었다.
마티스는 1869년 프랑스 북부의 시골 르 카토 캉브레지에서 태어났다.
마티스가 처음 관심을 보인 분야는 의외로 법률이었다. 암기에 소질을 보인 그는 법학을 전공해 변호사 자격증까지 얻었다. 마티스가 가진 첫 직업 또한 법률사무소 조수였다. 그는 정신 차려보니 두꺼운 법전만 읽고 있었다. 약간 단조롭긴 하지만, 평생 이렇게 살아도 나쁘지는 않을 삶이었다.
그런 그는 얼마 안 돼 예상치도 못한 순간을 맞았다.
갑자기 배가 아팠다. 고통은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참고 참던 마티스는 결국 병원을 찾았다. 충수염이었다. 당시로는 죽을 수도 있는 병이었다. 마티스는 곧장 수술을 받았다. 졸지에 중환자복을 입었다. 꽉 막힌 병원 입원실에 갇혔다. 마티스는 이때 처음 그림을 그렸다. 원래는 별 뜻이 없었다. 창밖 풍경을 대충 그리며 시간이나 죽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림을 그릴수록 평생 겪지 못한 감정에 젖을 수 있었다. 첫사랑을 만난 듯한 설렘이었다. 절대자를 마주하는 듯한 두근거림이었다. 마티스는 마법처럼 화혼(畵魂)에 취해버렸다. 퇴원한 그는 하던 일을 다 접었다. 어디에 홀린 듯 예술가의 성지인 파리로 갔다. 1891년, 스물두 살 때였다.
모두가 마티스를 향해 혀를 끌끌 찼다.
평생 붓도 제대로 쥔 적 없는 청년이 갑자기 그림을 배운다는 데 비웃기 일쑤였다. 그래도 마티스는 마냥 좋았다. 그림을 그릴 때는 늘 행복했다. 막히고, 고민할 게 생기면 외려 성장할 기회를 맞았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그간 몰랐던 엄청난 재능을 찾아 성공 가도에 오른다는 식의 신화는 없었다. 마티스는 전통 화풍을 구사한 윌리엄 부그로(William Bouguereau·1825~1905)의 수업에서 겉돌았다. 새롭게 유행하는 인상주의 화풍에도 완전히 녹아들지 못했다.
마티스는 당시 그 누구보다도 특이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가장 큰 특징은 자유분방한 색 표현이었다. 마티스는 사과를 빨갛게, 바다를 파랗게만 칠하지 않았다. 그날 기분대로, 그때 마음이 가는대로 물감을 찍어발랐다. 그러다 보면 한 캔버스에 빨강과 초록, 노랑과 보라 등 극명한 대비를 갖춘 색이 만개하곤 했다.
마티스에게 예술이 종교라면 교주는 폴 세잔이었다.
원근법의 규칙을 깬 그의 정신을 이어받고 싶었다. 그래서 '보이는 대로 칠해야 한다'는 색채의 규칙까지 깨버린 것이었다. 1905년 가을, 마티스는 한 전시회에 그의 방식대로 그린 〈모자를 쓴 여인〉을 내걸었다. 여성 얼굴을 녹색과 노란색, 하늘색으로 칠한 그림이었다. 목에는 주황색, 입술에는 보라색을 칠한 작품이었다. 역시나 비난이 줄을 이었다. "야수처럼 포악하고 거친 그림", "끔찍한 색의 향연" 등 감정 섞인 악평도 쏟아졌다. 마티스는 졸지에 야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금이야 야수파는 강렬한 색채를 특징으로 둔 현대 미술의 출발점 대접을 받지만, 그때는 그저 마티스를 조롱하는 멸칭에 불과했다.
마티스는 쏟아지는 혹평이 풀이 죽었을까. 그럴 리 없었다.
마티스는 자기만의 길을 계속 걸었다. 색채에 대한 실험을 지속했다. 이는 예술을 단순히 숙제 내지 돈벌이로 생각하면 할 수 없는 행보였다. 1910년, 마티스는 새로운 그림을 내놓았다. 〈춤〉이었다. 마티스는 언젠가 해변에서 본 어부들의 춤을 표현했다. 알몸을 훤히 드러낸 다섯 사람이 손에 손을 잡은 채 흥겹게 노는 장면을 옮겨담았다. 그는 이를 구현하기 위해 딱 세 가지 색만 썼다. 붉은색으로 어부, 파란색으로 하늘, 초록색으로 동산을 칠했다. 그게 다였다. 최소한의 색만으로 이토록 동적인 기운을 끌어낸 것이었다. 마티스는 이 그림 탓에 재차 "대중의 얼굴에 페인트 통을 던진 격"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역시나 괘념치 않았다.
이쯤 마티스는 저 혼자 새로운 도전을 또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림 자체의 단순화였다. 그는 애초에 작업에 임할 때 선부터 적게 긋는 일을 연습했다. 인물의 눈코입, 사물의 디테일, 벽면의 문양과 패턴 등을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하는 기법을 연구했다. 스케치부터 간단하게 하면, 최소한의 색으로 최대한의 분위기를 내는 기법 또한 더 큰 효과를 낼 것으로 본 것이었다. 이게 통했다. 대중은 차츰 마티스의 간결한 그림에 관심을 주기 시작했다. 고작 선 몇 개로 그은 이목구비, 밋밋하게 표현한 소품과 배경에 외려 호기심을 보였다. 색채로만 채워진 공간을 지긋이 음미하고, 이를 자유롭게 해석하는 데 비로소 재미를 느꼈다. 마티스의 그림은 그렇게 다가오는 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줬다. 가벼운 선, 조화로운 색채로 은근한 행복감을 안겨줬다.
"지금의 평론가와 대중은 당신의 미술을 반대할 것이오. 하지만 미술의 미래는 자네 것일 게 분명하오."
러시아 대부호이자 눈 밝은 수집가 세르게이 시츄킨은 불과 몇 해 전, 마티스가 비난에 흠씬 얻어맞던 그 무렵에 이런 말을 했다. 시츄킨이 예견한 미래는 어느덧 성큼 다가와있었다.
마티스는 그의 뜻과 상관없이 피카소의 덕도 본 편이었다.
천재 화가로 유례없는 주목을 받던 피카소가 직접 지목한 맞수가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마티스였다. "그의 뱃속에는 태양이 들어있다." 피카소가 마티스를 두고 한 평가였다. 자존심깨나 부린 그마저 마티스의 태양을 녹여낸 듯한 색채에 경이로움을 느낀 것이었다. 마티스의 끝 모를 도전은 이제야 빛을 볼 수 있었다.
마티스는 특유의 화풍을 구사하는 실력이 절정에 닿았을 때 〈루마니아풍의 블라우스를 입은 여인〉을 그렸다.
여성의 볼륨 있는 머리카락과 무표정의 얼굴을 고작 몇 번의 붓질로 그렸다. 봉긋하게 솟은 어깨, 가지런히 모은 두 손 또한 심플하게 표현했다. 세밀한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했다. 이 그림은 이처럼 가볍기에 되레 부담 없이 볼 수 있다.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 딱딱 골라 보인다는 점에서 세련된 느낌도 갖는다. 배경에 크게 칠해진 빨간색, 옷에 새겨진 주황색과 검은색 등의 아라베스크 문양은 경쾌한 분위기를 더한다. 동심의 세계 내지 누구나 해봤을 법한 낙서의 추억도 떠올리게 한다.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지는 그림이었다.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든지, 마음을 무겁게 하는 따위의 주제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 걱정 없이 편안하게 머리를 눕힐 수 있는 안락의자 같은 미술을 꿈꾼다."
마티스가 직접 말한 그의 철학이 그대로 녹아있는 작품이었다.
마티스도 이제 피카소 못지않은 거장 반열에 섰다.
마티스는 행복의 화가 내지 색채의 마술사로 불렸다. 되바라진 야수니, 들짐승이니 하는 멸칭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마티스의 그림 값은 나날이 치솟았다. 그는 프랑스 최고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풍파는 또 찾아왔다. 그게 십이지장 암이었다.
마티스는 엄청난 성공을 하고도 예술에 대해 순수한 사랑을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늘 그랬듯 그는 암마저 더 좋은 예술을 위해 넘어야 할 산으로 봤다. 주저앉아 절망하지 않고, 또 어떻게든 넘어갈 방법을 궁리한 것이었다. "가위는 연필보다 더 감각적이군." 마티스는 가위와 색종이로 〈이카루스〉를 만든 날, 이러한 새로운 세계를 접한 후부터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또 했다. 마티스는 침대에 기댄 채 계속 색종이를 오렸다. 〈이카루스〉를 포함해 스무 점의 결과물을 완성했다. 당시 재즈를 즐겨듣던 마티스는 이 작품들을 〈재즈〉라는 제목의 판화집으로 엮어 출간했다. 그의 꺼지지 않는 열정은 책과 음반 표지, 벽지와 전시회 포스터 등 디자인에 또 한 번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티스는 몸이 더욱 굳어가는 와중에도 담대한 도전에 또 나섰다.
마티스는 죽기 2년 전 〈왕의 슬픔〉을 만들었다. 그의 색종이 작품 중 가장 기념비적인 대작이었다. 화폭 속 마티스는 검은 옷차림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다. 노란색 악기가 보이지만, 연주한다기보다는 되레 깔린 모습에 가깝다. 한때 회화의 왕이었던 그가 이제는 침대와 휠체어에 꼼짝없이 묶여있는 처지를 표현한 것이다. 마티스는 그런 검은색 자화상 왼쪽에 노래하는 여인, 오른쪽에 춤추는 여인을 배치했다. 이들은 마티스를 사이에 둔 채 마지막 공연을 선보이고 있는 모습이다. 하루하루 눈에 띄게 약해지는 마티스는 알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사랑한 그림은 물론, 이제는 음악과 춤 등 모든 분야의 예술과 이별해야 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마티스는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 이별을 받아들인다는 뜻에서 이 작품을 완성한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마티스다웠다.
마티스의 강렬한 색채는 여전히 눈물겹게 잘 어우러졌다. 흩날리는 노란 조각들은 인생의 졸업을 축하하는 꽃가루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농도 짙은 슬픔마저 따뜻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상태였다.
마티스는 1954년 11월 3일에 죽었다.
여든다섯 살 나이였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내가 이렇게 간절하게, 절실하게 그림을 그렸다는 건 아무도 몰랐으면 한다." 그의 일기 속 문장이었다. 마티스도 사람인 이상 뜻대로 되지 않는 그림을 관두고 싶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질시와 병마 틈에서 소리를 빽 지르곤 다 내려놓고 싶을 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마티스는 이를 예술을 향한 순수한 사랑과 동경으로 극복했다. 험담을 뒤로 한 채 끊임없이 도전했고, 손가락질을 못 본 척하며 치열하게 연구했다. 그 결과, 진심 어린 마음이 마침내 무엇을 꽃피울 수 있는지를 몸소 증명할 수 있었다.
"나는 내 그림에 봄날의 밝은 즐거움을 담으려고 했다."
마티스는 이런 말도 했다. 그런 파란만장한 삶에서도 끝끝내 아름다움만 보려고 했다는 얘기였다. 삶의 이치를 통달한 듯한 그의 말, 따뜻하고 화사한 그의 그림은 벽에 가로막힌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준다.
〈참고 자료〉
앙리 마티스, 폴크마 에서스, 마로니에북스
앙리 마티스, 캐럴라인 랜츠너, 알에이치코리아
발칙한 현대미술사, 윌 곰퍼츠, 알에이치코리아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입니다.
2022년 4월부터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이 기사들은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작품편 ▷신화편 ▷현대미술편 등 특별전을 선보이며 지금도 앞장서 도전과 실험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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