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시계와 ‘팬덤 정치’ [김범수의 소비만상]
기술의 발전으로 시계의 가격이 급락하고, 휴대전화의 보급으로 손목시계 없이 다니는 인구가 급증했다. 지도자의 서명이 박혀있는 시계는 보물로서의 ‘포상’ 기능을 잃어갔다. 반면에 기념품이라는 기능이 커지면서 ‘정치적 팬덤’을 상징하는 도구로 재탄생되는 중이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온라인에서 ‘인증’을 하는 문화도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통령 시계’를 인증하기도 했다.
온라인상에서의 대통령 시계 인증은 주변 사람들을 넘어 불특정한 다수에게도 부러움을 불러 일으켰고, 정치인은 이 같은 기념 시계가 정치로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특히 2010년대에 들어서 스마트폰을 통한 SNS가 발달되기 시작하면서, 이 같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인증 문화는 더욱 커졌다. 정치인들은 소수의 지지자에게만 인기 있었던 1990년대의 대통령 시계와 달리 세대와 계층을 뛰어넘는 선망의 ‘아이템’으로 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오늘날에도 ‘대통령 시계’는 이미지 정치의 대표적인 방법이다. 기념 시계를 제작할 때 디자인부터 문구까지 심혈을 기울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소비 심리를 자극했고, 이는 대통령의 이미지 상승으로 이어졌다.
◆팬덤의 ‘노무현 시계’와 가품까지 등장한 ‘이명박 시계’
‘노무현 시계’는 일반 버전으로는 사각형 케이스로 디자인됐다. 뒷면에는 “원칙과 신뢰 새로운 대한민국”이라는 글귀와 노 전 대통령의 서명이 함께 각인돼 있다.
사실상 노 전 대통령의 기념시계부터 대통령 시계는 기념품을 뛰어 넘어 정치적 팬덤을 보여주는 ‘굿즈’로 재탄생 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전까지는 대통령 시계가 지지자의 충성심을 자극했다면, ‘노무현 시계’ 부터는 자신의 팬덤을 보여주기 위해 착용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하는 정치인이나 일반인들도 공식 석상에서 ‘노무현 시계’를 착용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노 전 대통령은 이라크 자이툰 파병 장병이나 여성을 위한 다양한 버전의 대통령 시계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 같은 다양한 버전의 ‘노무현 시계’는 사실상 에디션 취급을 받으면서 더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 예를 들어 노무현 시계 ‘에디션’은 노무현 대통령 사망 이후, 유족 기부 명목으로 180만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하지만 임기말부터 이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아지면서 ‘이명박 시계’의 인기도 급락하기 시작했다. 매번 차이가 있지만, 이명박 시계는 역대 대통령 시계 중 가장 낮은 가격에 책정된다. 게다가 다소 호불호가 갈리는 사각형 디자인도 낮은 인기에 한 몫하고 있다.
◆희귀한 ‘박근혜 시계’와 엉뚱한 ‘대행 시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기념시계는 광복절인 2013년 8월 15일에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들에게 처음 공개됐다. 국내 시계 제조업체인 ‘로만손’(Romanson)에서 제작한 ‘박근혜 시계’는 세련된 디자인과 희소성이 맞물려 잠깐이나마 아버지인 ‘박정희 시계’의 중고가를 아득히 추월하기도 했다. 얼마나 보기 힘들었는지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조차 가지고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처럼 ‘박근혜 시계’가 귀해지면서, 이를 착용하는 사람은 곧 박 전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가품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가품을 착용하면서 박 전 대통령과 친분을 위장해 사기 행각을 벌이는 사례도 생겼다. 이 ‘박근혜 시계’는 대통령 탄핵으로 한 때 인기가 크게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준수한 디자인과 희소성, 박정희 대통령의 후광효과 등으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아니고, 권한대행 기간이 길었던 것도 아닌데 ‘대행 시계’를 제작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시국 당시 고건 전 총리는 ‘대행 시계’를 만들지 않았고, 더 나아가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직책을 승계한 최규하 전 대통령도 기념 시계를 만들지 않았다.
또한 박근혜 시계의 경우 취임 이후 몇 달 뒤에 나온 점을 감안하면 권한대행을 하자마자 튀어나온 ‘황교한 시계’는 악평 일색이다. 게다가 시계 디자인조차 급하게 만들어진 듯 성의없다는 평이다.
◆폭발적인 인기의 ‘문재인 시계’
문재인 시계를 받은 사람들의 인증샷이 SNS에 올라오기 시작했고, 이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에 자극받은 지지자들이 사돈에 팔촌까지 끌어모아 구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풍경도 벌어지기도 했다. ‘문재인 시계’ 등장 초기에는 ‘박근혜 시계’처럼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도 쉽게 가질 수 없는 시계이기도 했다.
특히 문재인 정권은 이 시계를 청소노동자나 여성경찰, 평창동계올림픽 국가대표 선수 등에게 우선 지급하면서 ‘이미지 정치’에 활용했고, 당시에는 큰 성공을 거뒀다. 게다가 디자인 측면에서도 ‘문재인 시계’는 ‘박근혜 시계’와 더불어 준수하다는 평이 일색이었다. 특히 당시 시계의 유행이 절제된 형식의 디자인이었는데, 문재인 시계 역시 절제되고 전통적인 미(美)를 잘 살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다만 ‘박근혜 시계’와 다르게 많이 생산돼서 오늘날에는 중고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가격으로 내려왔다.
게다가 ‘윤석열 시계’는 오는 4월 총선을 정치 갈등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과거에 비해 퇴색됐을지라도, 여전히 ‘대통령 시계’는 포상으로서, 이미지와 팬덤 정치 도구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범수 기자 swa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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