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오픈런'까지.... 노년도 뛰게 만든 '이 가수' [수·소·문]
"포토카드 받자" 1020처럼 열정적
'효도텐트'는 K팝 공연으로 선순환
편집자주
‘수ㆍ소ㆍ문’은 ‘수상하고 소소한 문화 뒷 얘기’의 줄임 말로 우리가 외면하거나 놓치고 지나칠 수 있는 문화계 이야기들을 다룹니다.
5일 오전 8시 30분쯤 서울 은평구 소재 하나은행. 임모씨(59)는 은행 문 열기 전 입구 앞에 접이식 의자를 펴 놓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 옆엔 남편 이모씨(62)가 서 있었습니다. 황혼에 들어선 부부가 이른 오전부터 집을 나서 은행 문 열기만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포토카드 수집은 K팝 팬덤의 전유물이 아니다
임씨는 "임영웅 포토 카드 받으러 왔다"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는 '영웅시대'(임영웅 팬덤)였습니다. 임영웅은 지난달부터 이 은행 광고 모델로 나섰습니다. 그 일환으로 은행은 고객 유치 등을 위해 임영웅의 얼굴이 박힌 포스터와 포토 카드를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몰리기 전 이 기념품을 사수하기 위해 일찍부터 집을 나선 임씨가 오전 9시 영업 시작 전부터 은행 문 앞을 지키고 섰던 것입니다. 임씨 뒤엔 10여 명이 줄을 서 은행 문 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좋아하는 가수의 얼굴이 콕 박힌 포토 카드 수집은 K팝 아이돌을 좋아하는 10~20대만의 놀이 문화가 아닙니다. 열정은 늙지 않습니다. 황혼에 접어든 분들도 젊은 세대와 똑같이 좋아하는 가수의 포토 카드를 적극적으로 모았습니다. 임영웅이 광고 모델로 나선 뒤 전국에 있는 이 은행 지점 곳곳에서 '오픈런' 목격담이 굴비 엮이듯 온라인에 올라오고 있는 배경입니다.
39년 '이산계좌' 찾기
사람들이 몰리면 어디서든 진풍경이 펼쳐지기 마련입니다. 아내를 따라 오랜만에 은행 외출에 나선 이씨는 임영웅을 좋아하는 딸에게 포토 카드를 주려고 창구를 찾았습니다. 예금 통장을 새로 만들며 이 은행 계좌를 신설하고 임영웅 기념품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저 통장 좀 만들려고요." 이씨의 주민등록증을 받은 은행 직원은 컴퓨터로 잠시 확인해 보더니 "통장 안 만드셔도 되겠는데요?"라고 웃으며 응대했습니다. 전산으로 확인해 보니 1985년 이씨가 이 은행 통장을 만든 게 확인이 돼서였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옛 통장엔 10여만 원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임영웅 포토 카드 받으러 왔다가 39년 동안 잊고 있던 계좌에 '공돈'까지 찾은 겁니다. 오랫동안 뿔뿔이 흩어진 이산가족 상봉하듯 '영웅시대'인 아내와 딸 때문에 모처럼 은행을 찾은 아버지가 '이산 계좌'를 만난 셈입니다.
새 '웅지순례'.... 자식들은 광고 사진 찍어 주며 '덕질' 지지
임영웅이 은행 광고를 시작한 뒤 '영웅시대'에겐 새로운 '웅지순례'(임영웅과 관련된 곳을 성지순례하듯 찾아다니는 것) 코스가 생겼습니다. 하나은행 명동 사옥과 강남 신세계센트럴시티 등입니다. 이 은행 명동점에 큼지막하게 걸린 임영웅 대형 사진을 배경으로, 신세계센트럴시티의 번쩍이는 영상 광고판을 배경으로 사진과 영상을 찍는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이날 오후 4시쯤 고속버스터미널 매표소 앞 신세계센트럴시티를 가보니 홀 여섯 기둥에 설치된 LED판에 나오는 임영웅 은행 광고 영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영웅시대'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 중엔 60대도 있었지만 30대도 있었습니다.
'영웅시대' 부모를 둔 자식들은 퇴근길 버스정류장에 있는 임영웅 광고 사진 등을 휴대폰으로 찍어 보내며 부모의 '덕질'을 지지했습니다. 인스타그램엔 최근 이런 글도 올라왔습니다. '복지관 노래 교실 가기 전 1등으로 (은행) 달려가신 귀여운 울엄마. 통장 개설하는 동안 임영웅 자랑을 하는 엄마께 (은행 직원이) 어쩜 그리 표정도 밝고 젊으시냐고 했다더라. 그런 엄마의 모습이 넘 보기 좋다며 직원분이 사진 찍고 가시라며 (휴대폰으로) 각을 잡아가며 임영웅 등신대 옆에서 정성 들여 사진을 찍어 주셨다고 한다. 엄마! 지금처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요 우리.' 자식들이 '영웅시대' 부모들에 효도하는 방법입니다.
'행사 않는' 임영웅에 광고 몰리는 이유
임영웅 팬덤은 구매력이 높고 적극적이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이런 팬덤을 둔 임영웅을 광고 모델로 쓰려는 기업들의 경쟁도 치열합니다.
연예계 및 광고 업계 종사자들에게 물어보니, 임영웅의 광고 모델료는 1년 계약에 9억 원 선이라고 합니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에서 뛰고 있는 손흥민 선수가 10억 원 선으로, 연예인 중에선 '특A급' 대우입니다.
임영웅 측은 광고 계약을 할 때 광고 촬영 외 별도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 등을 하지 않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은행 등 임영웅과 손을 잡은 기업들은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광고 계약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장에서 큰손으로 떠오른 '영웅시대'의 '화력'에 그만큼 주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중장년 팬덤의 열정은 학계에서도 호기심의 대상입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음악신경과학 연구실은 임영웅 음악을 좋아하는 팬과 K팝 아이돌그룹 NCT127 음악을 좋아하는 팬을 대상으로 이르면 이달 뇌파 실험 연구를 진행한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뇌파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확인하는 연구 대상으로 K팝 아이돌 팬과 함께 임영웅 팬을 함께 모집하는 게 이채롭습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103020010001579)
'효도텐트' 등장 후 공연 관람 문화 변화
이렇게 중·장년세대가 주축이 된 팬덤은 광고 시장뿐 아니라 공연 관람 환경까지 바꾸고 있습니다. 임영웅 공연장엔 '효도 텐트'가 마련돼 있습니다. 공연장에 부모를 들여보낸 자식들이 대기하는 공간입니다. 대형 텐트엔 의자가 수십 개 놓여 있고 겨울엔 난로도 설치됩니다. 이런 야외 대기소 문화는 '영웅시대'를 계기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난 2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KSPO돔(옛 체조경기장)에서 시작된 아이유 공연에도 이런 야외 대기소가 등장했습니다. '홀씨존'이란 이름이 붙은 대형 텐트엔 의자와 난로가 설치돼 있었습니다. 아직 기온이 찬 만큼 밖에서 공연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들을 위해 아이유 측이 마련한 공간입니다. 중·장년 팬덤 등장으로 바뀐 공연 관람 문화가 이렇게 K팝 공연 전반으로 선순환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여줄 또 다른 문화 변동은 어떤 것일까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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