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2013년 가을, 2024년 봄, 그리고 김우람

손동환 2024. 3. 9.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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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4년 2월호에 게재됐다. 인터뷰는 1월 22일에 진행됐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대중 음악 혹은 아티스트 사이에서 ‘원-히트 원더(one-hit wonder)’라는 표현을 쓴다. ‘한 개의 싱글 혹은 한 개의 곡만 큰 흥행을 거둔 아티스트’를 의미한다.
KBL을 거친 선수 중에도 한 시즌에만 빛났던 이들이 있다. 2013~2014시즌에 커리어 하이를 찍었던 김우람도 그 중 하나다.
그러나 김우람은 한 시즌의 찬란함보다 더 큰 시련들을 마주했다. 그런 이유로, 생각보다 일찍 선수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찬란함과 시련을 모두 경험했던 김우람은 현재 경희대 코치를 맡고 있다. 모교에서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다.

한 줄기 빛
2011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는 KBL 역사에서 중요했던 순간이다. 오세근과 김선형(이상 서울 SK), 최진수(울산 현대모비스) 등 일명 ‘황금세대’가 프로 진출을 알렸기 때문.
위에 언급된 선수 외에도, 대학 무대를 주름잡던 선수들이 많았다. 그런 이유로, 드래프트에서 부름을 받지 못한 유망주들이 많았다. 경희대 재학 중이었던 김우람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김우람은 절벽에서 살아남았다. 2군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전주 KCC(현 부산 KCC) 유니폼을 입었기 때문. 어렵게나마 프로의 맛을 볼 수 있었다.

2011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 나섰습니다. 그렇지만 지명은 받지 못하셨는데요.
사실 걱정을 크게 안했습니다. 그렇지만 변수가 생겼어요. 제가 3~4학년 모두 부상으로 뛰지 못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1군 드래프트에서는 부름을 받지 못했어요. 그리고 나서 드는 생각이 ‘이제 뭐 먹고 살지?’였습니다.(웃음) 그 생각이 아직도 강하게 박혀있어요.
‘선수 김우람’을 살려준 무대가 있었습니다. 2군 드래프트였는데요.
KCC가 저를 뽑아주셔서 너무 감사했지만, 저는 당시만 해도 ‘난 1군 드래프트에는 뽑히지 못했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2군 생활로는 희망을 품기 어렵다고 느껴서, 아무 생각 없이 단상에 있었던 것 같아요.
프로에 진입했지만, 생존을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초조함이 컸을 것 같아요.
KCC 2군 코치님께서 저의 고등학교 은사님이셨습니다. 천정열 코치님(전 데이원스포츠 기술고문)이셨죠. 저를 잘 아는 분이고, 농구를 즐겁게 할 수 있도록 해주신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초조함을 느끼기보다, 힘을 얻었던 것 같아요.

One-hit wonder
2군에 입성한 김우람은 D리그의 전신인 WINTER LEAGUE(이하 윈터리그)에 사활을 걸었다. 먼저 2010~2011시즌 중에 열린 윈터리그에서는 9경기 평균 33분 55초 동안 16.7점 5.2어시스트 4.2리바운드(공격 2.0)를 기록했고, 2011~2012시즌 중에 개최된 윈터리그에서는 18경기 평균 36분 42초를 코트에 있었다. 경기당 기록은 21.2점 4.4어시스트 4.1리바운드(공격 1.8)에 1.4개의 스틸.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었다.
그러나 김우람은 KCC 소속으로 정규리그를 많이 뛰지 못했다. 2011~2012시즌부터 두 시즌 동안 44경기 밖에 나서지 못했고, 평균 출전 시간도 10분 내외에 지나지 않았다. 2군에서는 ‘데릭 로즈’라는 별칭도 얻었지만, 1군에서는 존재감 자체를 남기지 못했다.
그리고 김우람은 터닝 포인트를 맞았다. 2012~2013시즌 종료 후 부산 KT(현 수원 KT)로 이동한 것. 전창진 감독(현 부산 KCC 감독)의 눈에 든 김우람은 열심히 운동했다. 2013~2014시즌 정규리그 전 경기(54경기)에 나섰고, 경기당 23분 59초 동안 7.0점 1.8어시스트 1.7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주전급 자원으로서 KT의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기여했다. 결과적으로, 2013~2014시즌은 김우람의 ‘one-hit wonder’가 됐다.

데뷔 후 2년 동안 윈터리그에서 맹활약했습니다.
드래프트에 선발된 선수들 모두 윈터리그를 출전할 수 있었습니다. 저를 보여주고 싶었고, 그런 이유로 집중력을 더욱 높였습니다. ‘1군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독기와 목표 의식 밖에 없었거든요. 또, 천정열 코치님께서 “대학교에서 하던 건 잊고, 처음부터 다시 해보자”며 격려해주셨습니다. 거기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윈터리그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던 것 같습니다. ‘2군에서 뽑힌 선수가 저렇게 한다고?’라는 칭찬의 이야기도 들었고요. 기회를 점점 많이 얻다 보니, ‘1군에서도 해 볼만 하겠는데?’라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돌아보면, 2군 드래프트에서 뽑힌 게 정말 잘 됐다고 생각해요.
반면, KCC에서는 정규리그 경기를 많이 치르지 못했습니다.
2군에서 운동을 열심히 했고, 1군에서도 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KCC 선수들이 워낙 좋았고, 제가 그 속에서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때가 오히려 초조함이 컸던 것 같아요.
다만, 지금 시점에서 그때의 저를 돌아본다면, 저는 너무 부족한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시즌 중에 1군 무대를 밟았기 때문에, 팀에 녹아드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2012~2013시즌 종료 후 KT로 이적했습니다.
사실 그때 상무를 지원했습니다. 팀도 저도 ‘상무는 갈 수 있을 거다’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마침 FA(자유계약)였어요. 내심 ‘다른 팀에서 도전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당시 KCC 사무국장님께서 “시장에 한 번 나가봐라. 다시 돌아와도 계약을 해줄 거니, 기회를 한 번 찾아봐라”고 배려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편안한 마음으로 FA 시장에 나왔고, KT에서 저를 선발했습니다. 저를 선발해준 KT와 저를 배려해주신 KCC 모두에 감사했어요.
KT 이적 첫 시즌(2013~2014)에 커리어 하이를 찍었습니다.
1번 포지션에서 경쟁을 해야 한다고 느꼈고, 전창진 감독님께서도 “좋은 기회가 있을 거니, 열심히 훈련해라”고 동기 부여를 해주셨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무엇보다 ‘기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더 간절하게 훈련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포지션에 있던 (김)현중이형(현 퀀텀 바스켓볼)과 (김)현수(현 울산 현대모비스) 모두 다쳤습니다. 제가 무조건 뛰어야 했어요. 마침 비시즌 준비를 잘했던 터라, 주어진 기회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던 것 같아요.

두 번의 시련, 그리고...
프로 스포츠 선수는 누구나 새로운 인생과 마주한다. 선수만 평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우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우여곡절이 컸다. 부상으로 인한 우여곡절이었다. 먼저 2017년 11월 8일에 왼쪽 무릎 전방십자인대 파열을 당했다. 1년의 공백을 안긴 부상이었다.
포기하지 않았지만, 또 한 번 시련을 겪었다. 2019~2020시즌 준비 과정에서 같은 부위를 또 한 번 다친 것. 주장 완장까지 찼지만, 시즌 아웃 확정. 부상 후유증 또한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은퇴를 결정했다.

2017년 11월 8일. 처음으로 십자인대를 다쳤습니다.
비시즌 내내 몸이 안 좋았어요. 어렵게 복귀하기는 했지만, 1라운드에 부침을 겪었죠. 마침 출전 시간도 짧아져서, ‘몸을 만들고, 경기 감각을 끌어올리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십자인대를 다친 거죠. 많은 감정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건강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습니다.
2019년 7월 10일에 또 한 번 십자인대를 다쳤는데요.
팀에서 저에게 주장을 맡겨주셨습니다. 책임감을 강하게 느꼈고, 보여줘야 한다고도 다짐했습니다. 무릎 회복 경과가 썩 좋지 않았음에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죠.
그리고 첫 연습 경기를 치렀습니다. 아마 건국대랑 연습 경기였을 거예요. 몸이 어느 정도 적응돼서, 예전처럼 강하게 움직이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다쳤습니다. ‘끝났다’고 생각했어요.(웃음)
그리고 당시 서동철 감독님(현 대한민국 남자농구 국가대표팀 코치)께 “이제는 은퇴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만 감독님께서는 “지금은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만 시간을 두고, 너의 미래를 결정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눈 후, ‘하는 데까지는 해보자’고 다짐했습니다. 계약 기간도 1년 남았었거든요.
2021년 4월 6일에 복귀전을 치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프로 통산 마지막 정규리그 경기가 됐습니다.
순위가 결정된 경기였습니다. 또, 배길태 코치님(현 삼선중 A코치)께서도 서동철 감독님한테 저의 출전을 말씀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렇게 코트를 밟았는데, 너무 좋더라고요.(웃음) 감사하기도 했고요.
무릎이 비록 좋지 않았지만, 이를 악물고 뛰었습니다. 미래가 보장되지 않았기에, 뛸 수 있을 때 있는 힘을 다하려고 했습니다. 신인의 마음으로 코트를 뛰려고 했고요.
불운한 부상으로 은퇴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억울하지는 않으셨나요?
“후련하다”는 인터뷰를 남기기는 했지만, 사실 1년 정도는 너무 속상했고 억울했습니다. 농구도 못 보겠더라고요. 열심히 했지만, 부상으로 끝을 맺은 거니까요. 그렇지만 저 스스로를 다잡으려고 했습니다. 이미 끝난 일을 속상해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아쉽기는 했지만, 열심히 했습니다”
‘뭐하고 지내세요?’의 마지막 주제는 자신의 농구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다. 김우람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농구 인생을 돌아봐달라”고 말이다.
김우람은 어린 시절부터 20년 넘게 코트에서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모교 후배들을 지켜보고 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농구와 함께 한 김우람은 “아쉽기는 했지만, 열심히 했습니다”며 자신의 농구 인생을 돌아봤다.

지금은 모교인 경희대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학생 선수들의 목표 도달에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저 역시 그 과정에서 많은 걸 배우고 있어요. 다양한 학생 선수들과 아마추어 농구 환경을 접하다 보니, 지도자 선배님들의 어려움도 알게 됐고요.
다만, ‘어떻게 해야, 우리 선수들이 발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가 지도자로서 한 단계 발전할까?’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특히, 좋은 선수들이 저희 학교에서 많이 나오도록, 지도자로서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농구 환경 또한 많이 생각하고 있고요.
‘농구’는 어떤 의미인가요?
(농구에) 모든 걸 쏟기는 했지만, (농구에) 모든 걸 쏟으면 안 된다고도 생각했습니다. 농구를 보기 싫은 때도 있지만, 농구와 관련된 길을 걷고 있고요. 농구는 그런 의미에서 정말 애증인 것 같아요.(웃음)
‘김우람의 농구 인생’을 한 번 돌아봐주세요.
생각보다 힘든 상황에도 큰 결과물을 얻었습니다. 반대로, 저에게 주어진 기회를 부상으로 잃기도 했습니다. 분명 아쉬웠어요. 그렇지만 제 농구 인생에 아쉬움만 있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요. 남부럽지 않게 열심히 했거든요. 그래서 ‘아쉽기는 했지만, 열심히 했습니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실 건가요?
주변에서 “자식을 낳으면 농구를 시킬 거냐?”라고 물어봅니다. 그때마다 저의 대답은 “재능이 있으면 시키고, 그렇지 않으면 반대할 거다”입니다. 재능 없는 노력은 더 큰 고통을 수반할 수 있거든요. 노력에 비해, 한계가 크다는 느낌도 들 거고요. 그래서 저도 저의 재능을 확신할 수 있다면, 농구를 할 겁니다.(웃음)

일러스트 = 락(본문 첫 번째 사진)
사진 제공 = KBL(본문 2~4번째 사진), 김우람(본문 마지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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