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작품…침대보다 푹신, 솜이불보단 단단하게 [ESC]
인건비 싸던 때 백반집 단골반찬
약불에 정성 들여 겹겹이 말아야
계란물에 기름 넣으면 더 촉촉
허영만 선생이 진행하는 백반집 기행 프로그램이 있다. 취재 후보가 다 떨어졌는지 중국집도, 양식집도 나온다고 한다. 쓸 만한 백반집이 그만큼 없다는 뜻도 되고, 어쩌면 백반이란 결국 우리가 일상으로 한끼 사 먹는 음식을 다 그리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은 이 프로그램을 아주 옛날 내가 기획한 적이 있었다. 아는 방송작가에게 아이템을 전달했는데 답이 없었다. 이미 나 말고도 많은 방송 기획자들이 생각하고 있던 기획이었을 거다. 어쨌든 백반집 순례는 간당간당 다 떨어져 가는 음식 프로그램 아이템의 구세주였다. 하기야 세상의 많은 발명품들은 창의성의 순서가 아니라 ‘누가 먼저 했느냐’하는 선착순의 문제이기도 하다.
술집에선 공짜가 아닌 이유
백반은 동네마다 구성에 특징이 있다. 전라도 쪽은 압도적으로 젓갈이 나온다. 그것도 가짓수가 많다. 온갖 젓갈로 무치고 양념해서 낸다. 충청도 내륙은 나물이 많이 나온다. 청주 육거리시장에 가면 특정 물품만 취급하는 가게가 많아서 눈길을 끄는데, 그게 바로 나물이다. 나물 전문 가게가 십수곳 성업하는 시장을 가진 곳은 강원도 말고는 청주가 유일할 것 같다. 당연히 백반집에도 나물 반찬이 많이 나온다. 요새 백반집은 제육볶음과 옛날 소시지부침이 빠지지 않는 것 같다. 특히 도시의 뒷골목 백반집의 단골 반찬이다. 남녀노소 다 좋아하기 때문이다.
한때는 계란말이가 많이 나왔다. 소위 ‘인건비’ 싸던 시절, 주인이 몸을 갈아 넣어 밥집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몇해 전, 계란 파동이 일면서 슬쩍 줄어들었다. 안 그래도 계란말이는 손이 많이 간다. 계란을 풀어 한겹씩 말 때 각을 잡고 모양을 굳히기 위해 눌러주게 되는데 그 압력의 힘에 따라 보드랍거나 단단한 결과를 낸다. 그냥 말아버리는 게 아니라 약한 불에 농도를 조절하면서 겹겹이 말아낸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 기술에 따라 계란말이의 맛이 결정된다. 이걸 속성으로 해버리면 뜨거울 때는 괜찮지만 식으면 딱딱해지고 맛이 없다.
손으로 눌러보아 침대보다는 좀 푹신하고 솜이불보다는 조금 단단한 정도로 부쳐야 딱 좋다. 이 경도는 결국 시간이 만들어준다. 계란물을 흘리면서 반쯤 익었을 때 한겹씩 말아내는 기술이다. 새침하게 각이 잡히고, 씹으면 미세하게 계란의 얇은 층 사이가 풀리면서 혀에 더 깊은 만족을 준다. 사각거리는 양파와 당근이 씹히면 그게 또 좋고 더러 매운 청양고추 다짐이 자칫 비릿한 계란에 자극을 일으킨다. 개인적으로는 다진 청양고추를 넣는 건 별로 안 좋아한다. 온통 매운 한국식 반찬에 계란만은 그저 수수하게 심심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여러분은 동의하시는지.
이렇게 어려운 계란말이를 주는 백반집도 드물고, 주더라도 공들여 만들기 어렵다는 걸 느낀다. 시간이 돈이고 그 시간은 사람이라는 비용이 나간다. 그래서 백반집 무료 계란말이는 보통은 얼른 둘둘 말아서 내는 듯하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 계란말이라니. 그런 수고가 있기 때문에 제육볶음은 리필해도 계란말이는 더 달란 말이 쉽게 안 나온다. 술집에선 내가 알기론 절대로 계란말이가 공짜가 아니다. 1만원이든 2만원이든 제법 값이 세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건 우리가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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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첩 만큼 괜찮은 마요네즈
계란말이가 반찬으로 등장한 건 아주 오래전인 것 같다. 초등학교 때 도시락 반찬으로 이미 인기가 있었다. 대략 먹고살 만한 집 아이들이 싸오는데, 어머니가 정성이 있으면 김을 한겹 같이 말고, 거기에 다진 햄을 넣어서 색깔도 맛도 조화를 부렸다. 새벽부터 일하러 나가시던 우리 어머니가 계란말이를 반찬으로 해주신 기억은 없다. 계란말이는 시간이 필요한 음식이었으니까. 그때까지는 계란말이를 케첩에 찍어 먹지 않았다. 케첩은 비쌌고 집집마다 냉장고에 굴러다니는 그런 소스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케첩이 만만해지면서 계란말이와 궁합이 좋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됐다. 케첩은 일본에서 우연히 나폴리탄 스파게티(패망 뒤 일본이 미군부대에서 나온 케첩을 이용해 만든 파스타)를 만들었고, 우리나라에선 핫도그 소스와 계란말이, 1980년대 민속주점과 호프집의 인기 안주였던 ‘쏘야’(소시지 야채볶음)의 재료가 되었다. 나는 여전히 케첩 없이 먹는 걸 좋아하지만. 참, 계란말이를 마요네즈에 찍어 먹어도 꽤 좋다는 건 여러분들이 아시는지 모르겠다.
계란말이는 겉을 바삭하게 지질 수도 있고, 부드럽게 마무리할 수도 있다. 한국인은 대체로 갈색으로 바삭해진 걸 좋아한다. 소주에 얼음을 타고 계란말이에 한잔한다. 옛날 기차에서는 술과 주전부리 파는 홍익회 아저씨들이 왔다 갔다 했다. 호객을 하던 그들의 말은 시간대마다 바뀌었다. 식사시간에는 “따끈한 도시락 있어요”였고, 오후가 되면 “시원한 맥주와 오징어 있어요”였다. 나는 소주도 간혹 마셨다. 맥주는 오비 아니면 크라운 딱 두 종류였는데(주로 시중에서 인기가 덜한 크라운이 많이 실렸다.) 소주는 특이하게도 기차가 이동하는 순서에 따라 바뀌었다. 목포·광주를 지날 때는 보해, 전북 지역으로 올라가면 보배, 대전을 통과한 후에는 선양이었다. 소주도 영역(일명 ‘나와바리’)이 있던 전설의 시대였다. 우연히 마트에서 선양소주가 보이길래 한병 사서 계란말이를 안주로 하고 마셨다.
계란말이 만드는 법을 소개한다는 건 의미가 없다. 여러분들이 더 잘 알 거다. 계란물을 섞을 때 기름을 조금 첨가(계란 5개 섞을 때 식용유 1큰술)하는 건 팁이다. 더 고소하고 촉촉함이 오래 간다. 마요네즈 찍어 드시는 것도 잊지 마세요.
글·사진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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