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 하락하는데 고용은 잘나가네?
높은 하늘에서 비행기의 고도를 낮추고 활주로에 부드럽게 착륙하는 소프트랜딩(연착륙)은 비행기를 조종할 때 가장 어려운 일이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중앙은행은 금리인상으로 높은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과정에서 경기가 크게 악화되지 않는 소프트랜딩을 바라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최근 미국 경제에서 실업률의 큰 상승 없이 인플레이션이 빠르게 하락하는 소프트랜딩이 나타나고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인플레이션에 대응한 통화정책은 비행기 조종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어서 소프트랜딩은 통화정책의 성배(聖杯)로 불리기도 한다. 기준금리가 인상되면 이에 반응하여 시장의 다른 금리들이 상승하고 자산시장도 위축된다. 이에 따라 기업과 가계가 투자와 소비를 줄여 경기가 위축되고 인플레이션이 하락하게 된다. 문제는 현실에서 이 과정이 매우 복잡하다는 것이다. 통화정책은 길고 가변적인 시차를 지니고 있어서 인플레이션이 당장 하락하지 않는 경우 중앙은행이 계속 금리를 인상하여 결국 경제를 침체시키는 하드랜딩(경착륙)으로 이어지기 쉽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전 부의장 앨런 블라인더에 따르면, 1965년 이후 미국 경제엔 ‘금리인상 사이클’이 11회 나타났다. 그러나 1994~1995년의 금리인상만이 완벽한 소프트랜딩으로 이어져 당시 연준 의장인 그린스펀을 전설로 만들었다. 이를 제외하면 연준은 대부분 소프트랜딩에 실패했고, 특히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 금리인상의 결과는 심각한 불황과 하드랜딩이었다. 그러나 블라인더는 ‘금리인상 이후 1년 동안 국내총생산이 1% 이상 하락하지 않거나 경기침체가 나타나지 않은’ 경우를 따로 ‘소프티시 랜딩(softish landing)’이라고 부른다.소프트랜딩까지는 아니지만 금리인상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경기침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에 따르면 11차례 금리인상 가운데 네 차례는 이 소프티시 랜딩에 해당한다. 인플레가 아주 높지 않고 외부적 충격이 없다면 ‘심각한 경기침체 없는 랜딩’이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980년대 이후 가장 높았던 ‘팬데믹 이후 인플레이션’에 대응해 2022년 이후 진행된 연준의 금리인상은 과연 미국 경제에 어떤 ‘랜딩’을 가져올 것인가. 또한 소프트랜딩 가능성이 거시경제학과 통화정책에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 먼저 미국의 최근 인플레이션과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진 치열한 논쟁을 되돌아보자.
2021년 2월 거시경제학의 대가인 래리 서머스 하버드 대학 교수는 한 칼럼에서 팬데믹에 대응한 트럼프와 바이든 정부의 재정 확장이 과도하다며 앞으로 경기가 과열되고 인플레이션이 높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리비에 블랑샤르 MIT 명예교수도 1조9000억 달러에 달하는 바이든의 경기부양책으로 인한 총수요 확장이 ‘잠재 산출(한 국가 경제에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서 도달할 수 있는 국내총생산 수준)’을 크게 웃돈다며 비슷한 견해를 표명했다. 그러나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경기를 고려하면 재정지출을 충분히 늘리지 못할 경우의 위험이 더 크다며 이러한 우려를 일축했다. 폴 크루그먼 뉴욕 시립대학교수도 이에 동조했다. 2021년 여름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전년(2020년) 대비 5%를 넘어섰지만, 연준은 인플레이션이 팬데믹으로 인한 공급 측 교란에 따른 일시적 문제이며 곧 하락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른바 ‘일시적 인플레 팀(Team Transitory)’ 대 ‘지속적 인플레 팀(Team Persistent)’ 사이의 논쟁이다.
소프트 또는 하드, 어떤 랜딩인가?
결과적으로 당시 인플레이션은 일시적이지 않았고 2022년에도 지속적으로 높아져 같은 해 4월엔 전년 대비 9.1%를 기록했다. 2022년 말에도 7%를 웃돌았다. 연준은 기존 입장을 뒤집어 2022년 4월부터 기준금리를 급속히 올리고 2023년 중반까지 5%포인트 이상 인상했다.
이제 모두가 높은 인플레를 걱정하게 되었다. ‘물가상승을 억제하려면 어느 정도의 경기침체와 실업률 상승이 필요한가’에 관한 논의가 분분했다. 2022년 6월 서머스 교수는 노동시장이 과열되어 있다며 인플레를 연준의 목표(2%)까지 낮추려면 6%의 높은 실업률이 5년이나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과도한 총수요와 노동시장 과열이 인플레의 원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70년대와 같이 임금상승-물가상승의 악순환에 대한 우려가 금리인상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하지만 다른 목소리도 존재했다. 전 연준 경제학자 클라우디아 샘이나 크루그먼 같은 학자들은 여전히 팬데믹 이후 인플레의 주요 원인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중국의 상하이 봉쇄 등 공급 측 문제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팬데믹 이후 위축된 대면 서비스에 비해 일부 내구재 수요와 가격이 빠르게 높아진 부문 간의 불균형도 인플레 상승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런 공급 측 문제들이 개선되면 인플레이션이 자연스레 하락할 수 있다고, 크루그먼 등은 주장했다. 실업률의 큰 상승 없는 소프트랜딩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연준의 급속한 금리인상은 불필요한 경기 위축과 실업률 상승을 가져올 수도 있을 터였다. 이 같은 ‘소프트랜딩 팀’과 ‘스태그플레이션 팀(높은 실업률이 인플레 하락을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 사이에서 논쟁의 2라운드가 전개되었다.
2라운드 논쟁의 결과는 어땠을까. 흥미롭게도 2023년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2022년과는 반대로 급속히 낮아졌다. 이러한 현실은 스태그플레이션 팀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2라운드의 논쟁에서는 소프트랜딩 팀이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고 크루그먼은 주장했다. 2022년의 인플레이션이 높게 지속된 것은 사실이지만 스태그플레이션 팀은 총수요와 노동시장의 과열만 강조하다가 공급 측 문제를 간과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연구가 지적하듯 1970년대와 달리 노조 조직률이 크게 낮아지고 노동자들의 협상력이 약해진 최근 상황에선, 물가인상이 임금인상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한편 팬데믹 이후에는 노동시장 참가율도 하락했고 우려와 달리 기대인플레이션도 크게 높아지지 않았다. 따라서 실업률이 낮고 노동시장이 뜨거워 보인다 해도 인플레이션이 자극될 가능성은 크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연준이 주목하는 물가지수인 ‘근원 개인소비지출(core PCE)’의 상승률은 2022년 초의 5%대 중반(2021년 같은 시기 대비)에서 2023년 12월엔 2.9%까지 하락했다. 특히 최근 6개월만 고려하면 ‘근원 개인소비지출’ 기준 물가상승률은 2%(연율 기준) 이하로 내려가 연준의 목표치가 이미 달성된 셈이다.
〈그림〉은, ‘근원 개인소비지출 상승률(1년 전 대비)의 변화’와 실업률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2023년의 경우, 인플레이션이 빠르게 하락했는데 실업률도 낮게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매우 드문 사례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인플레이션이 크게 하락한 시기엔 실업률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같은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23년은 오히려 2차 세계대전 또는 한국전쟁 이후 시기와 매우 비슷하다.
2023년에 ‘매우 부드러운 랜딩(인플레가 크게 떨어졌지만 실업률이 낮은)’이 가능했던 것은 역시 ‘팬데믹 이후 인플레이션이 수요 측이 아니라 공급 측 문제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2023년 9월 발표된 루스벨트 연구소의 한 보고서는 인플레이션 하락이 수요 정체 때문인지, 아니면 공급 증가 때문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123개의 상품 및 서비스의 가격과 산출량 증가율을 분석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2023년 나타난 인플레이션의 하락은 약 73%가 공급 증가 덕분이었다. 이는 ‘공급망 교란’ 자체 혹은 ‘공급망 교란과 수요 간 상호작용’으로 이번 인플레이션 현상의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는,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의 최근 연구 결과와 유사하다.
이번 미국 인플레이션은 치열한 논쟁을 촉발하는 등 수많은 경제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기존 거시경제학 교과서는 ‘실업률이 하락하면 인플레이션이 높아진다’는 필립스곡선에 기초한 논의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처럼 노동시장과 총수요에 주목하는 필립스곡선 관계는 노동자의 협상력 약화를 배경으로 2000년대 이후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팬데믹 이후 급속히 높아졌다가 하락한 인플레이션의 경험도 수요 측을 강조하는 주류적인 논의의 한계와 함께 간과되었던 공급 측 요인을 분석해야 할 필요를 잘 보여준다. 최근의 인플레이션 경험은 더 많은 경제학 연구의 발전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통화정책과 인플레이션의 미래
미국 경제의 인플레이션 변화는 다시금 통화정책을 둘러싼 뜨거운 논의를 낳고 있다. 특히 최근 금리인상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별로 둔화되지 않아서 이제 통화정책과 금리 변화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줄었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는 주택담보대출이나 회사채에서 변동금리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최근 매우 줄어들었고, 상대적으로 자본투자가 덜 필요한 서비스업 비중이 높아졌다는 현실과 관련 있을 것이다. 특히 팬데믹 이후 여전히 일손이 부족하여 금리인상이 노동시장을 식히는 데도 과거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로 미국의 1월 비농업 일자리는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어 35만 개나 증가했다. 따라서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빠른 금리인하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했고, 6월께에야 기준금리 인하가 시작될 것으로 전망된다. 무엇보다 성급하게 금리를 인하하면 다시 인플레를 자극하여 1970년대 연준의 실패를 반복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1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서비스물가 상승률이 높아서 예상치보다 높은 전년 대비 3.1%를 기록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금리인상의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난다면 연준이 금리인하에 머뭇거릴 경우 경기침체를 가져올 수 있다고 비판한다. 샘은 연준이 과거의 데이터만 보고 있다며 당장 금리인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1월 소매판매와 산업생산이 예상치보다 낮아서 경기가 식는 신호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논자들은 인플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금리인하를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2023년 미국 경제는 성장이 둔화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2.5%나 성장하며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4분기 성장률이 연간으로 3.3%였고 올해 1분기도 3% 가까운 성장이 전망되는 현실에서 빠른 금리인하는 경기과열과 인플레 촉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소프트랜딩을 위해서는 인플레가 높아져도 안 되고 경기가 많이 나빠져도 안 되니 연준의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2024년 미국 경제는 과연 완전한 소프트랜딩에 성공할 것인가.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하지만 몇몇 요인은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미국 노동자들의 임금상승률은 여전히 높다. 애틀랜타 연준의 임금상승 트래커(tracker)에 따르면, 임금상승률이 2022년 중반 이후 하락했지만 2024년 1월 현재 약 5%로서 높은 수준이다. 이렇게 높은 임금상승과 견조한 소비 증가는 총수요를 떠받쳐 인플레 하락을 가로막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다행스러운 점은 2023년 4분기 비농업 기업 부문 노동생산성 상승률이 3.2%(연율)를 기록하는 등 2분기 이후 노동생산성이 빠르게 높아져 물가상승 압력이 완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적극적인 재정지출과 총수요 확장에 기초한 이른바 고압경제 전략, 그리고 보육 투자 확대 등으로 노동 공급을 늘리고자 하는 바이든 정부의 현대적 공급 측 경제학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경제호황과 완전고용은 실행을 통한 학습이나 기업의 신기술 투자를 촉진하여 노동생산성 상승을 촉진할 수 있다. 이는 총수요와 직결되는 통화정책이나 임금상승만이 아니라, 넓게 보면 공급 측을 촉진하는 노력도 인플레이션의 미래에 중요한 요인임을 시사한다. 결국 수요와 공급 모두의 변화와 그 상호작용이 미국 경제가 어떻게 ‘랜딩’할지를 결정할 것이다.
이강국 (리쓰메이칸 대학 경제학부 교수)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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