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키오가 진정 되고 싶었던 것 [독서일기]

장정일 2024. 3. 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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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로 철학하기〉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문정 옮김
효형출판 펴냄
ⓒ이지영 그림

〈피노키오로 철학하기〉(효형출판, 2023)에는 카를로 콜로디의 〈피노키오의 모험〉(1883)과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이 동화를 해석한 〈피노키오. 두 번의 해설과 세 번의 그림이 있는 인형의 모험 이야기〉(2021)가 합본되어 있다. 475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탈리아반도에는 1400여 년간 통일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1861년, 마침내 이탈리아 건국이 이루어지자 콜로디는 지역주의와 전근대성으로 낙후된 조국을 근대적으로 계몽하기 위해 저 교훈적인 동화를 썼다. 나무토막에서 꼭두각시 인형으로 탄생한 피노키오는 인간으로 재탄생되어야 할 막중한 임무를 지게 된다. 이것은 신생국가 이탈리아에 대한 은유이다.

제페토 노인은 칠리에지아 노인이 탁자의 다리를 만들려고 하던 나무토막을 얻어와 나무 인형을 만든다. 독자들에게 피노키오는 취학이 가능한 연령대의 어린 소년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피노키오가 태어나서 활동한 시기를 모두 합하면 고작 3년밖에 되지 않는다. 이처럼 어린아이나 꼭두각시 인형은 정직·노동·의무 교육이라는 시민의 미덕을 배우지 못했다는 뜻에서, 똑같이 비인간적인 존재다. 제페토는 피노키오에게 시민의 미덕을 강요하고 피노키오는 그것을 피해 달아난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자라나는 특성에 가려진 피노키오의 진짜 특성은 “전속력으로 달리기”이다. 작중에서 피노키오는 다리를 두 번씩이나 크게 다치게 되는데, 그때마다 부상에서 회복한 피노키오는 다시 달린다. 꼭두각시-어린아이가 보여주는 도주하는 특성은 칠리에지아에 의해 ‘다리’가 되어야 했던 피노키오의 본성에 합치하며, 꼭두각시-어린아이에게 춤과 공중제비 같은 기술을 가르쳐서 “빵 한 조각이나 와인 한 잔 값”을 벌려 했던 제페토의 목적과 어긋난다. 피노키오는 결코 인간이 되지 않는다. 대단원에 이르러, 피노키오는 꿈속에서 인간이 된 자신을 볼 뿐이다. 콜로디는 정직하고 근면하며 글 읽기와 쓰기 능력을 갖춘 표준적인 이탈리아 시민을 육성하기 위해 이 동화를 썼는데, 피노키오는 콜로디에 대항하여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일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야!”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모든 문명사회라면 다 그래야 하는데 말이야!” 손희정은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메멘토, 2024)에서 피노키오가 나무의 생기(生氣)를 갖고 태어났다는 점에 착안하여 신유물론을 피노키오 해석에 도입했다.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김영사, 2024)는 한병철이 2012년에서 2017년 사이에 독일의 여러 일간지와 주간지에 발표한 에세이 열네 편과 이 책을 위해 쓴 신작 에세이 한 편으로 구성되었다. 강렬한 제목에 이끌려 혁명에 대한 전작 에세이인 줄 알고 책을 구입한 독자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게다가 지은이는 흠집 난 바이닐 레코드처럼 했던 말을 또 하는 자기복제에 빠져 있다. 예컨대 그는 오늘날 혁명이 불가능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신자유주의 지배 체제는 구조가 전혀 다르다. 이 체제에서 체제 유지 권력은 더는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이다. 그 권력은 규율 체제에서처럼 확연히 눈에 띄지 않는다. 구체적인 상대도, 자유를 억압하는 적도, 맞서 저항하는 것이 가능한 적도 더는 없다. 신자유주의는 억압당하는 노동자를 자유로운 경영자로, 자기 자신을 부리는 경영자로 만든다. 지금은 누구나 경영자인 자신에게 고용되어 자신을 착취하는 노동자다. 누구나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 계급투쟁도 자신과의 내적 투쟁으로 바뀐다. 오늘날 실패하는 사람은 자책하고 부끄러워한다. 사람들은 사회를 문제시하는 대신에 자신을 문제시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폭력은 법치로 위장되고(예를 들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 3조), 타자 착취의 강도는 노동유연성으로 더욱 강화되었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지은이는 이 책에 처음 실은 ‘자본주의와 죽음 충동’이라는 에세이에서 자본주의는 죽음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맹목적인 축적(성과)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현대인은 절대적 타자(他者)이자 부정성인 죽음을 추방한 결과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우울과 소진(burnout) 상태에 빠지게 된다.

생태학으로 본 ‘죽음’

한병철이 “죽음을 받아들여 품는 삶만이 진정으로 생기 있다”라고 말하고, “죽음을 오물처럼 기피하는 삶은 자신의 분비물 속에 잠겨 질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할 때, 후지하라 다쓰시의 〈분해의 철학〉(사월의책, 2022)을 읽은 독자라면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죽음’을 좀 더 받아 삼키기 쉬운 ’분해‘라는 용어로 바꾸어놓을지도 모른다.

생태학에서는 어떤 것의 속성(무엇인가에 속해 있어서 분리할 수 없는 성질)이나 기능(어떤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작용)이 최종적으로 다 소멸되어 운동의 방향성이 상실되고 마침내 사라져버릴 때까지 흡수되고 이용되는 것을 분해라고 부른다. 지은이는 생태학에서 빌려온 이 정의를 무기물이나 인간 사회 일반에까지 확대한다. 즉 망가진 자동차를 공장에서 파쇄하여 재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분해이고, 아파트 단지와 도시에서 청소부와 넝마주이가 하는 일도 분해다. 우리는 효용이 다한 생활용품이나 자원을 없애버려야 할 쓰레기라고 부르지만, 분해라는 시각에서는 쓰레기가 달리 보인다. 어떤 것에 부속되어 있던 속성이 제거되고 기능을 잃어버린 물품은 다른 것과 합체되거나 새로운 용도로 활용되기 쉽다.

“쓰레기란 어떤 제품이 더 이상 사용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유자의 손을 떠난 후 다른 주인을 찾지 못한 채 결국에는 연소되거나 땅속에 매립되고 마는 것들의 총칭이다. 요컨대 쓰레기란 물건의 이름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사회경제 상황 속에서 그 물건의 최종 형태를 나타내는 말에 불과하다.” 드럼통의 철판을 펴서 자동차를 만들었다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도 있지만, 폐타이어를 재활용해 샌들 회사를 창업하는 등의 창의적 분해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생산과 소비의 무한루프(infinite loop)로 작동하는 자본주의가 분해 과정을 방해하거나 아예 말소한다는 것이다. 기업은 계획적 진부화(사용 중에 일부러 질이 떨어지도록 제품을 설계하는 것)와 수리에 필요한 부품 생산을 조기 단축함으로써 더 많은 신품을 공급한다. 이 때문에 분해의 담당자인 각 분야의 수선 기술자들이 주변에서 차츰 사라져간다. 자본주의는 기술문명의 분해 능력을 감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자연(생태계)의 분해 능력마저 감축한다.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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