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피카소 작품 너무 많아요”…과감히 버릴 이유 있다는데 [워킹맘의 생존육아]
하지만 이제는 저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와, 정말 똑같다. 아기가 혹시 천재 아니에요?”라고 답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엄마와 아빠 눈에는 아이의 그림이 초현실주의 화가가 그린 그림보다도 더 사실적이라는 사실을, 내 경험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이런 아이들의 ‘작품’은 매일매일 늘어난다. 유치원에 가더니 매일 작품을 완성하는 속도가 더욱 빨라져 양이 배가 되었다. 둘째가 조금 크면서는 두 아이의 작품활동이 너무 왕성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첫째가 어린이집에 간 첫해 고사리손 도장을 찍어 만들어 온 부채는 오랫동안 내 보물 1호였다. 나의 첫째는 세 살이 되던 해부터 가위질을 몹시 좋아해 색종이와 여러 오리기 책을 사줬는데, 퇴근해서 돌아와 아이가 오려놓은 만들기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나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 같은 것이었다. 풀과 테이프를 활용하기 시작하면서는 놀이방 곳곳에 아이가 오린 토끼를 비롯해 다양한 종이 친구들이 늘어났다. 처음엔 대견했지만 갈수록 이것을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놀이방이 화려하고 복잡해지는 것을 더 이상 두고만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뜯어버리자니 매일 아침 그 ‘종이 친구’들과 인사하며 그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아이의 동심을 파괴하는 것만 같아 미안해졌다. 그리고 버린다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고 말았다. 참 난감한 일이다. 하지만 너무 잘 만든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게 정말 만 세 돌밖에 지나지 않은 유아의 손놀림이 맞느냐는 말이다. 어떻게 눈·코·입 위치가 이리도 정확하며, 귀는 어떻게 앙증맞게 잘라놓았을까. 정말 내 딸은 제2의 피카소가 될 인물인 것인가. 감탄과 고민을 거듭하다 정리를 포기하기를 수일,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을 때가 되자 10년 전쯤의 나로 돌아가본다. 그렇다. 서두에서 언급한 “우리 아이가 그린 제 모습이에요. 정말 똑같죠?”라는 세상에서 제일 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하던 나 말이다. 일단 내 아이의 작품이라는 전제를 내려놓는다면 우리 아이의 이 엄청난 작품은 그저 네 살짜리 아이의 시간 떼우기용 놀이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피카소 딸을 둔 엄마와 아빠는 그날 저녁 큰 결심을 한다.
그렇지만 엄마·아빠의 결심보다 더 큰 난관이 남았다. 다음 날 아이의 눈물바다는 도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친구들이 사라져서 얼마나 슬퍼할까.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는 것일까? 결론은 쉬이 나지 않았다. 사실, 결론을 낼 수는 없는 문제이니 당연한 것 아닐까. 12시가 넘도록 토론을 이어가던 엄마와 아빠는 지쳐 잠이 들고 만다(물론 친구들은 모두 재활용 봉지에 담고 나서 말이다).
다음 날 기분 좋게 눈을 뜬 두 딸들은 여느 날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엄마의 심장은 두근 반 세근 반이다. 어떻게 달래줘야 하지, 울음이 길어져 출근길이 늦어지면 어쩌지,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는 아이를 눈으로 열심히 쫓는다. “엄마, 이 책 읽어주세요.” 우려가 무색하게 따님들은 책장에 붙여둔 친구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낸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어준다.
문득 미국 심리학자 바움린드가 ‘허용적인’ 부모보다는 ‘권위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허용적인 부모는 자녀를 통제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둔다. 많은 엄마들은 특히 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 마음대로 하게끔 하는 것이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판단에 허용적인 부모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부모 밑에서 큰 아이는 자립심과 자제력이 약해지고, 성취욕도 없는 모습을 보인다. 반항적이고 공격적인 성향도 생긴다.
권위 있는 부모는 자녀에게 규칙을 지키도록 하지만 왜 지켜야 하는지 명확하게 이유를 설명한다. 이런 부모와의 소통으로 아이들은 사회성을 길러나가고, 자제력도 생긴다.
그날 저녁 퇴근해보니 아이들이 각자의 자리에 새로운 친구들을 붙여놓았다. 식탁 의자에도 못보던 스티커가 붙었다. 식탁 의자에 붙은 스티커가 원하는 대로 붙지 않아 속상했다고 하는 둘째에게 “그럼 이 스티커는 떼어내고 그만 안녕 할까? 우리 집에 있었던 다른 종이친구들처럼 말이야”라며 슬쩍 어제 버린 종이 친구들 이야기를 해준다. 딸들은 대견하게도 고개를 끄덕이며 “안녕, 잘 가”라고 인사해줬다. 아이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단단하고 건강한 마음을 지녔구나. 나도 조금 더 단단한 부모가 되어야겠다고 또 한번 결심한다. 아이의 마음대로 놀이방에 작품을 붙여두게 해왔지만 엄마가 과감히 정리해줘야만 새로운 작품 활동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이는 아마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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