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윤의 작심한달] 잠시 세상과 멀어지고 싶을 때, 적어가는 '필사(筆寫)'의 시간

이채윤 2024. 3. 9. 09: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무관심에 외면했던 필사
일상의 시름 잊을 수 있어
취향 따라 호불호 갈려

해가 바뀔 때마다 올해는 무언가 큰일을 이루겠다고 마음먹지만, 연말이 되면 어떤 다짐을 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해지곤 합니다.

‘작심삼일’의 사전적 의미는 ‘단단히 먹은 마음이 사흘을 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결심이 굳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삼일’에 그치는 ‘작심’을 자꾸만 계속해 작심 일주일, 작심 한 달, 작심 일 년으로 이어갈 수 있다면 ‘굳지 못한 결심’은 느슨한 채로 이어져 목적지에 이를 수 있을 겁니다.

작심삼일을 밥 먹듯이 일삼는 이채윤 기자가 여러 취미를 찾아 한 달 동안 체험해 봅니다.

작심삼일을 반복해 작심한달을 한다면 ‘내 일’이 ‘내일’이 될 거란 기대로 말입니다. 일터가 아닌 곳에서 삶의 재미를 찾는 독자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생생한 경험담을 전합니다.

▲ 노트에 글을 쓰고 있는 모습[아이클릭아트 자료사진]

2. 잠시 세상과 멀어지고 싶을 때, 적어 내려가는 ‘필사’의 시간

마음이 붕 떠 있던 2월의 어느날, 몇 시간씩 보던 쇼츠들과 늘 좋아하던 노래들마저 소음처럼 느껴지는 밤이 찾아왔다.

긴 밤을 견디기 위해 책을 찾았으나 휴대전화 화면이 아른거렸다. 책에 눈은 뒀지만 집중도, 이해도 되지 않아 똑같은 문장을 몇 번씩 읽었다.

집중력 저하와 산만함은 스마트폰 중독으로 인한 것이 틀림없다는 위기감이 찾아왔다. 스마트폰 사용 대신 조용하게 집중할 수 있는 취미가 필요했다.

많은 취미 가운데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지 않는 디톡스(해독)를 할 수 있는 ‘필사’를 택했다.

사실 필사를 처음 하는 건 아니었다. 필사는 한때 친했다가 절교한 친구 같았다. 다시 필사해야겠다는 막연함만 있을 뿐, 막상 필사를 시작하기엔 서먹했다.

고교생 때까지 필사를 좋아했다. 아버지께서 주신 세일러 만년필을 갖고 다니면서 좋은 글이 있으면 공책에 빼곡하게 적었다. 용돈을 모아 파카 만년필을 사고, 양장 커버 노트들에 시를 베꼈다.

당시 열렬히 아끼던 소설가 신경숙의 ‘외딴방’에선 화자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필사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언젠가 그처럼 글 쓰고 싶어 난쏘공을 베끼곤 했다. 하지만 남들 다 하는 입시가 다가오자, 필사는 어느새 남 일이 돼 잊혔다. 이후 좋은 문장을 읽을 때면 필사 대신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다. 필사하지 않자, 좋았던 책에 대한 기억은 쉽게 휘발됐다.

 

▲ ‘필사’ 키워드가 태그된 게시물[사진=인스타그램 갈무리]

필사는 ‘베껴 쓴다’는 뜻으로, SNS를 살펴보니 ‘필사’ 키워드를 태그한 게시물이 무려 59만4000개에 달할 만큼 관심도가 높았다. 사람들은 다양한 분야로 필사하고 있었다. 책의 좋은 문장을 베껴 쓰는 것부터 성경 등의 구절을 필사하기도 했다. 필사 분야도 소설, 시, 자기개발서, 공부를 위한 영어 필사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취향에 맞게 필사하고 싶은 책을 고르면 된다.

이 가운데 ‘시집’을 필사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소설을 필사하려면 품이 많이 들 듯했다. 문장의 호흡이 긴 소설보단 상대적으로 짧은 시를 필사하는 게 미루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처음 필사를 시작한 날, 힘주어 베껴 쓴 시인의 말. 이채윤,

한여진 시인의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를 필사했다. 하얀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시들을 하얗게 펼쳐진 빈 공책에 좋아하는 만년필로 한자 한자 써 내려갔다.

필사할 때면 잠시 세상과 멀어진 채 일상을 잊을 수 있었다. 노트의 여백을 채우면 자질구레한 잡념이 가벼워졌다. 필사의 과정은 늘 살아가는 데 필사적인 나의 숨통을 트게 해줬다.

필사는 혼자 즐길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물론 함께 필사하고 공유할 수 있겠지만, 필사할 책을 선택하고 이를 쓰는 건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필사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도 깊은 곳으로 침잠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 좋았다. 게다가 필사하자 글을 밀도 있게 바라볼 수 있었다. 통독했을 때 놓쳤던 문장들을 찾아내 읽을 수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으로 보는 문장들을 쓰고 되뇌며 벅찬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늦게 찾아온 겨울을 필사의 시간으로 꼭꼭 씹어 넘겨 보낼 수 있었다. 아울러 필사하고 난 뒤 긴 분량의 책을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 한여진 시 ‘겨울 소설’의 일부분을 필사한 부분. 이채윤

◇ 책 좋아한다면 추천, 정적인 활동 안 맞으면 비추천

책을 좋아한다면 필사를 추천한다. 필사는 책의 내용을 더 오래 기억하게 할 뿐만 아니라 문장의 참맛을 알려준다. 그뿐만 아니라 필사는 문장력과 문해력을 향상하기도 하니 일거양득이다.

또 다이어리를 사용하는 기록러라면 스마트폰이 따라잡을 수 없는 필사를 강력히 추천한다. 필기의 감각과 소리를 좋아한다면 필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가히 자부한다.

정적인 활동을 선호하지 않는다면 필사는 취향에 맞지 않을 수 있다. 필사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속도전을 추구한다면 재미가 덜할 수 있다. 또, 손목 등 신체 부위가 좋지 않다면 필사는 고역이 될 수 있다. 펜을 쥐고 필사하다 보면 손이 아플 때가 있으니 무리해서 하는 것보다 마음내킬 때 하는 걸 추천한다.

근 십 년 만에 다시 한 필사는 시간이 무색하게 좋았다. 필사할 때 느꼈던 평온함이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독자들의 밤에도 찾아오길 염원한다. 아끼는 책과 종이, 연필 한 자루가 있다면 필사의 시간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