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아플수록 누군가 웃는…시장원리 의료의 위험성
의사 수와 공공성
미국, 의료 사유재 성격 보장
사립병원·제약사 수익 극대화
한국, 공공·지역의료 예산 삭감 중
‘공공성 강화’ 의대 정원 확대를
생명의 공공성이 사회적으로 지탱되기 위해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을 바로 세우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의대 정원 확대’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람의 건강을 다루는 보건의료서비스에는 사유재적 측면과 공공재적 측면이 교묘하게 공존한다. 대규모 제약회사가 대규모 투자를 통해 첨단 신약을 개발하고, 사립병원이 첨단 장비를 설치하고 고급 의료인력을 확보하여 영리를 추구하는 모습에서 사유재적 측면을 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이러한 측면이 아주 강조된 사회라 할 수 있다. 오로지 이 측면만으로 보건의료서비스를 바라볼 경우 더 위중한 질환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환자가 발생할수록 병원이나 제약회사는 더 많은 수익을 거두는 형국이 된다. 여기에 따를 경우 새 병원을 설립하는 기준은 비용 대비 편익의 크기가 된다. 의료서비스를 공급하는 의사의 입장에서는 단위 시간당 더 많은 환자를 더욱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반면 공공재적 측면에서 볼 경우 질병을 예방하여 사회구성원들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수록 보건의료체계는 성공한 셈이 된다. 제반 질환에 대한 유병률과 질환의 중증도를 낮추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 된다. 또한 비용 대비 편익의 크기보다 사회구성원이라면 모두 다 같은 정도의 의료 접근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 보건의료체계의 핵심 원칙이 된다. 국가 공공의료시스템을 운영하는 영국이 이러한 측면을 매우 강조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미국 제왕절개 수술비용 1504만원
미국은 1인당 보건의료 지출액이 1만2555달러(약 1667만원)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제약회사들이 미국에 있지만 미국의 약값은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의 경우 영국의 4배에 달한다. 치료 비용 역시 오이시디 최상위권이다. 미국에서 제왕절개 수술을 할 경우 평균 1만1326달러(약 1504만원)의 비용을 치러야 하는데 이는 2위인 스위스에 비해 3000달러 이상 비싸다. 미국 전문의의 평균 연봉도 영국의 2배 이상이다. 시장 친화적인 미국 보건의료체계가 보건의료서비스의 사유재적 측면을 과도하게 보장한 결과다. 제약회사가 더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국가는 약값 통제나 수급에 관여하지 않는다. 사립병원의 비율이 더 큰 병원 생태계는 시장 체제에 기반해 더 많은 고가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서비스별 요금제에 따라 보건의료 지출을 경쟁적으로 높이는 역할을 한다. 영국은 반대로 1948년부터 국가보건의료서비스(NHS)라는 국가 차원의 공공보건의료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보건의료서비스는 공공재라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있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은 누구나 고르게 의료서비스 혜택을 받는다는 측면과, 치료뿐 아니라 건강 증진을 통해 통합적 돌봄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아주 이상적이지만 여러 운영상의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보수당이 집권한 2010년 이래 예산이 줄면서 보건의료서비스 공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두 나라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보건의료서비스의 두가지 측면은 각 나라의 주어진 현실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공존한다.‘어떠한 원칙 아래 이러한 공존을 조정하여 최적화시킬 것인가’가 관건이다. 그 원칙은 생명의 공공성으로부터 나온다. 생명은 다른 생명과의 연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공적 존재이다. 또한 모든 인간 생명은 등가이며 절대적이라는 관점 역시 중요하다. 생명을 다루는 일은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다른 생명에 대한 책임 원칙을 실현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우리가 어떠한 사회에 살건 이러한 생명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보건의료체계는 공공성의 원칙을 기반으로 보건의료서비스의 두 측면을 현실 속에서 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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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정원, 공공 보건의료체계 안에서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 보건의료체계는 상당히 중요한 분기점을 맞고 있다. 조정 능력을 갖춘 공적 보건의료체계가 부재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최근 보건의료서비스의 사유재적 속성이 급격하게 강화되고 있다. 2023년 하반기 전공의 모집에서 소아청소년과의 경우 2.8%의 지원율을 보인 반면 정형외과의 지원율은 355.6%에 이르렀다. 지역의료가 붕괴되어 소아·청소년 인구 10만명당 소아청소년과 의원 수는 서울이 31.7개인 반면, 전남은 8.5개이다. 우리나라 전체 의료기관 중 공공의료기관의 비중은 5.4%로 오이시디 31개국 중 30위이다. 상황은 이러한데 공공 보건의료체계의 주된 수혜자가 될 노인 인구는 유례없는 속도로 늘고 있다. 2000년 고령화사회(65살 이상이 전체 인구의 7%)에 접어들었던 우리나라는 2025년에 초고령사회(65살 이상 20%)가 된다. 미국·영국에서 이러한 전환에 100년 안팎이 걸린 것에 비해 4배나 빠른 속도다.
이처럼 숨 가쁜 분기점에서 우리 보건의료체계는 공공성을 증진하는 것과 정반대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울산의료원과 광주의료원이 비용 대비 편익이 낮다는 기준에 의해 기획재정부의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지 못해 설립이 무산됐다. 노인 등 돌봄 대상자들이 요양병원에 들어가지 않고 주택지원, 방문진료 등 보건의료서비스를 받도록 하는 데 사용할 ‘지역사회 통합돌봄사업’의 2023년도 예산은 35억원으로, 전년 대비 80% 삭감된 금액이었다. 전국 44곳 지방의료원의 기능 보강, 감염병 대응, 공공보건프로그램 사업 등을 진행하기 위해 책정된 ‘지역거점병원 공공성 강화 사업’ 예산은 2022년에 11.6%, 2023년에 6.3% 삭감돼 1416억원으로 책정됐다. 2023년도 예산에서 ‘지방의료원 시설장비 현대화’ 예산은 613억원에서 487억원으로 축소됐고, ‘지역거점 공공병원 공공보건프로그램’ 예산은 7억원에서 약 1억원으로 감축되며 그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만성질환 관리 사업이 폐지됐다.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공공 보건의료체계의 원칙 아래서 수행되어야 한다. 지역사회 통합돌봄 시스템 확대, 대폭적인 공공의료기관 설립, 지역거점병원 공공성 강화, 지역의사제 도입, 공공 자치 의대 지정 및 설립 등과 같이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에 기반한 지역의료, 공공의료 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에 맞춰 의대 정원을 확대하는 것이 타당한 순서이다. 공공성의 기반 없이 단지 의사 수를 늘리는 것만으로 다가올 거대한 의료 공백을 메울 수 없기 때문이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교수
서울대와 프랑스 퀴리연구소, 영국 케임브리지 분자생물학연구소에서 생화학·면역학 등을 공부했다.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한 수용체 개발, 노화와 면역 사이의 연관 등을 연구하면서 대학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부단히 모색 중이다. ‘탐구한다는 것’, ‘이타주의자’, ‘소년소녀, 과학하라!’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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