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봉오리 유리잔에 위스키…손맛과 술맛이 만나다 [ESC]

한겨레 2024. 3. 9. 09: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박효성의 욕망하는 공예 술잔
오므려진 모양이 술향 모아줘
분청·옹기잔 청주는 깔끔·단맛
‘적당한 거품’ 잡는 맥주잔도
조각보를 닮은 문양이 위스키와 어울리는 김동희 작가의 유리잔.

겨우내 정지아 작가의 에세이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와 함께 밤을 보냈다. 청년 시절부터 족히 40여년을 술과 더불어 지은 인생 이야기가 술술 넘어가 오히려 아껴 읽었다. 소설 ‘빨치산의 딸’을 출간한 뒤 수배령이 내렸던 20대의 술은 동지였고, 밥벌이에 바빴던 때는 연민을 안주 삼아 마셨으며 때로는 해방의 출구였다.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귀향한 작가를 찾아 전남 구례에 온 지인들과 기울이는 술잔에는 그윽하게 익어가는 그들의 정이 담겼다. 나는 34편의 음주 예찬을 읽으며 소녀 시절 대학의 봄을 꿈꿨던 것처럼 소설가의 사연 있는 술자리를 동경했다. 나 또한 술과 인연을 맺은 지 25년이 되었음에도 내가 알던 술과는 다른 느낌이다. 발효가 빠르고 양껏 마시는 막걸리가 나라면 정지아 작가의 술자리는 섬세하게 숙성한 위스키 같았다.

‘건축가의 막걸리’는 고블릿잔에

특히 위스키를 좋아하는 작가의 취향 덕분에 책에는 다양한 종류의 위스키가 소개되고 책을 펼치는 밤이면 나도 으레 위스키를 유리공예가 김동희 작가의 잔에 담아 홀짝거렸다. 이 잔은 2022년 7월 갤러리 ‘월’(서울 삼청동)에서 열렸던 ‘매일의 유리’라는 작가의 개인전에서 구입했다. 그즈음 막 위스키의 매력을 알기 시작한 터라 귀하게 담아 마실 전용 잔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김동희 작가에게 직접 골라달라고 청해 갖게 된 추억도 있다. 꽃봉오리처럼 오므려진 모양은 위스키 향이 흩어지지 않게 모아주고, 정성껏 연마한 표면은 사각거리는 감촉으로 차갑고 도도한 유리의 물성을 따스하고 편안하게 바꾼다. 김동희 작가의 유리 작업은 계절과 날씨에서 영감을 받은 색을 면과 선으로 조합해 블로잉 기법(파이프를 이용해 불어 고열 상태 유리의 모양을 만드는 일)을 통해 완성하는데 첫인상은 조각보 같았다. 내 것은 하얀색의 면과 선으로 구성되어 한옥의 한지 문살을 닮았고, 눈이 소복이 쌓인 고요한 풍경 같기도 해서 한모금씩 마실 때마다 잔에서 눈도 손도 떼지 못한 채 한동안 어루만진다.

문학적 낭만이 깃든 작가의 술자리에 비해 시시하다고 여긴 나의 술자리도 다행히 이처럼 소소한 즐거움을 머금고 있다. 예전처럼 편의점에서 4캔에 1만원 하는 맥주만 계속 마셨다면 몰랐을 낭만이다. 위스키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막걸리, 전통주, 수제 맥주 등 술 선택의 지평이 그 어느 때보다 넓어져 골라 마시는 재미가 한층 더해졌다. 여기에 공예 애호가로서 술마다 어울리는 공예품 술잔을 찾는 여정은 근래 가장 즐기고 있는 혼술 주제다. 이때 마시는 술도 공예품처럼 누가, 얼마나 공을 들여 빚은 것인지 내력을 알 수 있는 것을 주로 선택한다. 만든 이의 이름과 마음이 가는 사연을 알고 나면 이미 그 술에는 다정한 맛이 깃들어서다.

천연탄산이 담긴 ‘건축가가 빚은 막걸리’를 마실 때 사용하는 청송백자의 고블릿잔(오른쪽)과 한결 작가의 옻칠나무사발.

회나 문어숙회, 찐 가리비 등 해산물이 먹고 싶을 때는 경남 통영의 ‘거북이와 두루미’ 양조장에서 2022년부터 선보인 ‘건축가가 빚은 막걸리’를 곁들인다. 건축가인 박준우 대표가 130여회 양조를 세밀하게 기록한 뒤 가장 좋았던 32번 조합의 작품이다. 건축가의 치밀한 설계가 적용되었다는 점에 끌렸다. 폭죽처럼 터지는 엄청난 양의 탄산이 특징인데 뚜껑을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열면서 탄산을 달래야 한다. 섣불리 열었다가는 막걸리의 절반이 솟구쳐 넘친다. 샴페인을 닮은 이 술은 청송백자(경북 청송군이 운영하는 백자 브랜드)에서 빚은 우아한 고블릿잔(받침 달린 잔)에 즐긴다. 일반적으로 샴페인은 입구가 좁은 잔으로 향과 탄산을 가두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이 막걸리의 탄산은 힘이 세 굳이 가둘 필요가 없고 잔 입구가 넓을수록 따를 때 거품이 덜 생겨 편하다. 기포가 터지는 소리도 경쾌하게 잘 들린다. 편안하게 마시고 싶을 때는 옻칠목공예가 한결 작가가 깎고 칠한 작은 나무 사발을 이용한다. 항균 효과가 있는 옻칠 덕분인지 순하게 정화되는 느낌인데다 잔도 가볍다.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뉴스레터’를 쳐보세요.

☞한겨레신문 정기구독. 검색창에 ‘한겨레 하니누리’를 쳐보세요.

술과 술잔의 페어링

우리의 인생은 술을 마셔야 하는 이유가 늘 있었고, 그 밤마다 술은 성심성의껏 혈관을 데웠다. 특히 맥주의 공이 가장 크다. 여러 브랜드의 병맥주·캔맥주를 오래 즐겼지만 최근 즐겨 마시는 맥주는 브루어리304 양조장의 수제 맥주다. 2015년 충남 천안에서 시작한 브루어리304는 일제 시대 경성의 서대문형무소 옥바라지를 위해 형성됐다는 영천시장(서울 서대문구) 인근의 여관 골목으로 2019년에 옮겨 자리를 잡았다.

‘브루어리304’의 밀도 높은 맥주 거품이 적당히 만들어지는 더블유와이유의 버블컵.

적당한 거품이 중요한 맥주에는 공예 브랜드 더블유와이유(WYU)에서 만든 ‘버블컵’이 1순위다. 맥주를 따를 때 컵을 기울여 각도에 신중을 기하지 않고 편하게 막 따라도 희한하게 거품이 상단에만 적당히 자리 잡는다. 여름이 시작될 즈음에는 막사발 다완에 맥주를 가득 따르고 두 손을 들어 올려 시원하게 들이키는 것이 나만의 여름맞이 연례행사이기도 하다.

요즘 다양하게 출시되고 있는 전통주 중에서는 ‘양온소 온’에서 빚은 석탄주와 과하주의 맛과 정성에 감탄했다. 약대를 졸업하고 평범한 주부로 살았던 정성진 대표는 어린 시절 양조장을 운영했던 외가의 추억 때문인지 술 빚는 공부에 푹 빠져들었고 환갑이 넘어서 양조장을 만들어 2021년에 쌀과 누룩만으로 청포도 향기가 감도는 석탄주를 출시했고, 뒤이어 더덕을 더한 과하주를 선보였다. ‘아쉬울 석’(惜)과 ‘삼킬 탄’(呑)의 한자를 써서 삼키기 아까울 정도로 좋은 술이라는 의미의 이 약주를 마실 때는 정재효·변승훈 작가의 분청사기 잔을 애용한다. 흙의 물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투박한 듯 자유로운 문양이 특징인 분청 잔은 쌀로 빚어 맑게 떠낸 청주를 편안하게 담아낸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분청이나 옹기 잔에 청주를 담으면 더 깔끔하고 단맛이 은근하게 더해진다.

‘양온소 온’의 과하주를 더 맑게 즐길 수 있는 정재효·변승훈 작가의 분청사기잔.

손으로 빚은 술맛과 공예가들의 손맛을 더불어 음미할 수 있는 공예 술잔과 술의 페어링. 이 봄, 느긋하고 아름답게 새로운 향취를 발견하는 풍류에 흠뻑 취해보길 권한다.

박효성 리빙 칼럼니스트

잡지를 만들다가 공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우리 공예가 가깝게 쓰이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가꿔주길 바라고 욕망한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