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한동훈 앞세운 초대형 수사팀... '현직 대통령'을 탈탈 털었다

강지수 2024. 3. 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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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국정농단 보고서: ②수사 과정]
1기특수본→특검→2기특수본 '배턴터치'
관계·재계·문화계·체육계 등 전방위 수사
"국민의 명령 따른 수사" vs "마녀사냥식"



편집자주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헌법재판소의 역사적 선고가 나온지 7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국정농단'이라는 이름 아래 이뤄진 수사와 재판은 모두 마무리 됐습니다. 국정농단은 대한민국 정치지형을 재편했을 뿐 아니라, 법원과 검찰 조직도 많이 변화시켰습니다. 국정농단이 이 나라에 남긴 유산과 숙제는 무엇인지, 이 사태가 세상을 어떻게 바꿨는지를 찬찬히 돌아보기 위해, 한국일보는 법조인 50명을 상대로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수사·재판 과정에 관여했거나, 사건을 가까이서 살펴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증언과 각종 통계, 기록 등을 바탕으로 '2,555일(7년)의 기록'을 다시 정리해 보려 합니다.



국정농단 의혹을 수사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2017년 3월 6일 서울 강남구 특검 사무실에서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국정농단  수사와 재판 7년의 총평가를 다룬 이전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연관기사

• 7년의 국정농단 수사·재판은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겼나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30802490004082)


"수사의 핵심대상은 국가 권력이 사적 이익을 위해 남용된 국정농단, 우리 사회의 고질적 부패 고리인 정경유착입니다. 국론 통합을 위해 국정농단 사실이 조각조각 밝혀져야 하고 정경유착 실상이 국민 앞에 명확히 드러나야 합니다. 그 바탕 위에 소통과 화합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게 특검팀 전원의 소망입니다."
(박영수 특별검사 최종 수사결과 발표)

2017년 3월 6일, '박영수호'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90일 간 숨가쁜 항해를 마쳤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 방향키를 쥔 박 특검은 파헤쳐야 할 대상이 '국정농단'과 '정경유착'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특검의 성과는 현직 대통령 박근혜에게 '뇌물' 혐의를 씌우며 부패한 민낯을 들춰낸 수사 결과로도 증명됐다. 특검은 '촛불시민'의 열렬한 지지 속에 3개월간 13명을 구속하고, 총 30명을 재판에 넘겼다. 특검은 박 전 대통령의 대면조사는 실패했지만, 그를 압박할 '농단'의 정황을 수두룩하게 포착했다. 그러고선 "남은 국민적 기대와 소명을 검찰로 되돌리겠다"며 검찰로 사건을 넘겼다.

특검의 성과 덕분에 '탄핵 시계'는 더욱 빨리 돌아갔다. 그해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박 전 대통령을 파면하면서 '형사 불소추 특권'을 가진 현직 대통령을 수사 대상으로 끌어내렸고, 법원은 3월 31일 박 전 대통령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2기 특별수사본부'를 꾸린 뒤 한 달여 보강 수사를 거친 검찰은 4월 17일, 마침내 의혹의 정점 '대통령 박근혜'를 재판에 넘겼다. 적용 혐의만 총 18개. 592억 원 뇌물수수, 직권남용, 강요 혐의가 포함됐다.그렇게 6개월간 이어진 수사가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국민 특검의 화려한 성과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수사를 맡은 박영수(오른쪽 네 번째) 특별검사가 2016년 12월 21일 서울 강남구 특검 사무실에서 특별검사팀 간부들과 현판식을 갖고 있다. 연합뉴스

1기 특수본→특검→2기 특수본을 거치며 전면에서 칼을 휘두른 건 특수통 검사들이었다. 윤석열 한동훈 이원석 이복현 등 특별수사 전문가들을 한데 모아 대규모 수사팀을 꾸렸다. 인원도 역대급이다. 6개월간 검찰과 특검, 그리고 다시 검찰을 거치며 꾸려진 수사팀 검사 총원만 모두 83명이었다.

의혹의 시작은 2016년 9월 말이었다. 한 시민단체가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씨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등을 고발했고,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에 사건이 배당됐다. 당초 검사 셋이 수사를 담당했지만 관련 의혹이 날마다 불거지면서, 김수남 당시 검찰총장은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특별수사본부 설치를 지시했다. 출범 땐 검사 15명이 활동했지만, 인원이 계속 보강되며 검사만 32명인 대형 조직이 됐다. 1기 특수본은 '농단의 주역'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을 잡았다. 또 그의 직권남용, 강요 등 혐의 공범으로 현직 대통령 박근혜를 입건했다.

그해 11월 국회에서 특검법이 통과된 뒤, 지명된 박영수 특검은 빠르게 수사팀 진용을 짰다. 수사팀장엔 윤석열(사법연수원 23기) 당시 대전고검 검사를 낙점했다. 그를 필두로 한동훈(27기) 당시 부패범죄특별수사단 2팀장, 신자용(28기)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장, 양석조(29기) 대검찰청 사이버수사과장 등 부장검사급 검사들이 참여했다. 이외 고형곤(31기)·김창진(31기)·이복현(32기)·김영철(33기) 검사 등 20명이 파견검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나같이 특별수사 경험이 많은 '엘리트 검사'라는 평을 받는 인물이었다. 파견검사 중 1기 특수본 소속이 7명으로, 3분의 1을 차지하면서 검찰 수사의 맥도 이어졌다.  때문에 검찰에서 넘어온 1톤짜리 트럭 한 대 분량의 수사기록을 단시간에 분석할 수 있었다.

국정농단 사건 검찰·특검 주요 수사 타임라인. 그래픽=김대훈 기자



삼성 뇌물→학사비리→블랙리스트

특검 수사는 박근혜·최순실을 중심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청와대 관계자들 뿐 아니라 문화·체육계, 대기업 수장들까지 전방위 수사를 벌였다. 가장 먼저 특검팀 수사의 칼날이 향한 곳은 삼성그룹이었다. 양재식 특검보를 중심으로 윤석열 수사팀장, 한동훈 부장검사 등 최정예 팀이 투입됐다. 공식 수사개시를 선언한 12월 21일, 특검은 국민연금공단과 보건복지부 등 '삼성 합병' 관련지 두 곳을 첫 압수수색 대상으로 삼았다. 최순실에 대한 삼성의 지원과 국민연금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찬성 사이의 대가 관계를 확인하는 차원이었다.

특검 1호 구속자도 삼성 관련자였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의혹' 관련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신병 확보에 성공했다. 당시 계좌추적과 관련자 조사를 병행하며 삼성의 최순실 일가에 대한 부당지원 정황 그림을 그려가고 있었다. 미르·K스포츠 재단에 200여억 원을 출연한 삼성에 대한 수사에 주력한 특검은 2017년 2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영장 재청구 끝에 뇌물공여 혐의로 구속했다.

"대기업들이 거액을 내게 된 과정이 과연 무엇인지, 거기에 대통령 역할이 작용한 게 아닌지, 즉 근저에 있는 대통령의 힘이 무엇이었는지를 봐야 합니다."
(2016년 12월 2일 박영수 특검)

특검은 대기업들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출연한 돈이, 실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뇌물이란 새로운 프레임으로 사건에 접근했다. 이른바 '제3자 뇌물'(공무원이 직무에 관한 부정 청탁을 받고 제3자에게 뇌물을 주도록 하는 것)이다.

같은 기간 특검의 다른 수사팀은 최서원씨 딸 정유라의 이화여대 입시비리 사건을 수사하며 최경희 전 이화여대 총장 등 교육계 인사들도 구속했다. 이와 별개로 자체 인지한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블랙리스트) 수사에도 착수했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특검법이 정한 14개 의혹엔 없었지만, '수사 과정에서 인지한 관련 사건'으로 수사 대상이 됐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이 무더기로 구속됐다.


제3자 뇌물, 경제공동체 도마에


2016년 10월 25일 대국민 사과를 하는 박근혜(왼쪽 사진) 당시 대통령·비선실세로 지목된 최서원씨. 연합뉴스·시사IN

7년이 흘렀다. 기소된 이들의 상당수는 유죄를 받았고 일부는 무죄를 증명했다. 형기를 다 살고 사회로 복귀했거나, 특별사면되기도 했다. 당시 수사에 대한 법조계의 평가는 제법 갈린다. "국민적 요구에 따라 해야 할 수사를 착실히 했다"는 칭찬과 "먼지털이식 무리한 수사였다"는 비판이 공존한다.

먼저 비판적 시각. 공격적으로 현직 대통령을 노린 특검 수사는 큰 성과를 냈지만, 7년이 지난 지금은 무리한 수사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게 나온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장을 지낸 '특수통' G 변호사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제3자 뇌물 혐의를 무리하게 가져다 쓴 점을 지적했다. G 변호사는 "부패 수사는 기본적으로 제3자가 보기에도 납득 가능해야 하고, 당사자도 어느 정도는 수긍하고 승복할 수 있는 범죄 행위를 가져가야(적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피 한 방울 안 섞인 두 사람(최순실과 박근혜)을 '경제적 공동체'로 보는 법리가 법원에서 인정됐다.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형사법을 가르치는 H 교수는 "경제공동체로 볼 수 없는 상황을 경제공동체로 본 게 지금 대법원에서 확정이 나 버려서 애매하고 황당하게 얼버무려졌다"고 평가했다.

또 특검은 박 전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당시 행적, 이른바 '세월호 7시간' 의혹 규명에도 실패했다는 한계도 노출했다. 특검은 "수사 대상은 아니지만, 국민적 관심이 크기 때문에 확인하는 것"이라며 '번외수사' 성격이라는 점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다.

숫자로 보는 국정농단 특검 수사. 그래픽=김대훈 기자



국민 성원 업은 수사... 정당성 분명

수사의 성과를 지적하는 법조인도 많다. 현직 수도권 검찰청의 I 부장검사는 "박근혜 대통령 수사 자체는 그 당시 반드시 필요했었고, 우리나라에 남긴 긍정적인 면도 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차장검사 출신 B 변호사도 "국민의 명령에 따른 수사였기에 검찰만 비판할 문제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로스쿨에서 형법을 가르치는 J 교수 역시 "수사는 불가피했다"며 수사 시작 당시 '비선실세'(최순실)를 두고 각종 의혹이 불거졌다는 배경을 강조했다.

"전방위적으로 수사가 들어가서 사회 최상층부의 여러 비리가 드러났어요. 그런 상황에서 모든 혐의를 낱낱이 밝혀 나라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게 국민적 요구였죠."
(형법 전공자 J 교수가 기억하는 국정농단 수사)

국민 눈높이는 맞췄지만, 유무죄를 가리는 과정에 검찰 내에서 충분한 토론이 없었다는 제한적 비판론도 있다. 다른 사건 특검 경험이 있는 K 부장검사는 "돌아보면 사실상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마녀사냥식 수사였다"고 꼬집었다.

국정농단 재판 이후 검찰 조직에 '불기소할 용기'가 사라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불기소 결정 때마다 '봐주기 수사' '적폐 검사'란 손가락질이 이어지자, 뭘 잡아내든지 무조건 기소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커졌다는 것이다. 검찰총장 후보로도 거론됐던 L 전 고검장은 "불기소하면 '예산 낭비다'라는 공격이 들어오는 탓에 뭐라도 꼬투리를 잡아서 기소하려는 풍조가 분명히 있다"고 씁쓸해했다.

검사는 기소할 생각만 하면서 모든 정황을 '유죄'에 끼워맞춰선 안 되고, 공익의 대표자로서 피고인의 정당한 이익까지 옹호할 의무가 있다는 얘기다. 이른바 '검사의 객관 의무'가 국정농단 수사에서 철저히 지켜졌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를 강조한 L 전 고검장은 이렇게 정리했다. "검찰은 실패한 수사를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기소하지 않는 것도 정의로운 수사일 수 있는 거니까요."

강지수 기자 soo@hankookilbo.com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이근아 기자 ga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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