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뒤 ‘특별한 2막’…조명이 켜지면 가슴이 뛴다 [ESC]

한겨레 2024. 3. 9.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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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직장인 연극
반복된 일상에 지친 이들, 직장인 극단 찾아 ‘무대 위 주인공’으로
연기 잘하려 사람 관찰하며 시야 넓혀…“다양한 인생 공부 기회”
“순수한 열정 가진 사람들과 함께…자존감도 높아지고 성장”
지난달 28일 서울 성북구에 있는 직장인 연극단 ‘아해’ 연습실에서 단원들이 함께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스튜디오 어댑터 염서정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고들 한다. 그러나 살다 보면 가끔, 아니 어떤 땐 자주, 내 인생에서조차 내가 엑스트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혹시 나는 이 세상 수많은 멋진 사람들의 인생을 돋보이게 만드는 ‘들러리’에 불과한 건 아닐까?

분명 내 무대인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만 화려한 조명이 비춰지는 것 같은 순간들. 무대 위 조명이 하나둘씩 꺼지고, 관객조차 없는 것 같은 그런 순간들을 삶에서 맞닥뜨리면 불안한 상상은 점점 현실이 되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고단할 때 다시 만난 첫사랑처럼

2018년 당시 이혜련(38)씨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밀려왔다. 30대 중반을 바라보면서어느새 자신의 무대를 비추던 조명들이 하나둘씩 꺼져가는 것과 같은 순간들 말이다. 반복되는 회사 생활, 지리멸렬해지는 인간관계 속에서 말수는 적어졌고 얼굴도 어두워졌다. 혜련씨는 자꾸만 어두워지는 삶의 무대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정말 행복했던 시간들은 언제였지? 예전에 난 정말 밝고 반짝이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뭘 하면 예전의 내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그러다 맘속에서 찾아낸 게 고등학교 시절 연극반이었어요.” 그렇게 문을 두드린 곳이 서울 성북구에 있는 직장인 연극 극단 ‘아해’다.

직장인들이 연극을 하는 시간은 퇴근 뒤에 열리는 특별한 2막이다. 저녁 7시에서 9시, 일주일에 한두차례 모인다. 연극을 시작하고 난 뒤 혜련씨의 삶은 크게 변했다. 위태롭게 점멸하던 조명들이 환하게 켜진 느낌이라고 했다. 배역을 맡고, 대본을 외우고 , 무대에 서는 순간들은 혜련씨에게는 자기 안의 또 다른 모습을 재발견하는 시간들이기도 했다. “한번은 제가 주로 맡아왔던 (성격이 강한) 역할과는 전혀 다른 배역으로 무대에 오른 적이 있어요. 귀여운 인물이었는데 의외로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아요. 그 역할을 맡으면서 깨달았죠. 나도 이런 발성으로 이런 식으로 대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나에게서 이런 면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신기하고 재밌었던 것 같아요.”

지난달 28일 ‘아해’ 연습실에서 단원 김민호(34)씨가 자유롭게 이야기를 표현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스튜디오 어댑터 염서정

극을 거칠 때마다 자신 안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면서 혜련씨는 연극에 더 푹 빠지게 됐다고 한다. 무엇보다 ‘열정’이 다시 살아났다. “연극을 하면서 마치 사랑에 빠지는 것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 사랑을 하면 이 사람만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이런 고민만 하잖아요. 저에겐 이게 연극이 된 거죠. 내가 맡은 배역을 더 잘해내려면 뭘 더 하면 되지? 어떤 표정, 말투, 혹은 목소리가 더 좋을지에 대한 고민이 계속 나왔어요. 그런 고민 속에서 삶이 더 열정적으로 변했던 것 같아요. 뭔가 더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게 만드니까요.”

혜련씨가 연극과 사랑에 빠지자 친구들도 변화를 눈치챘다. “친구들이 예전보다 얼굴도 밝아지고 활기찼던 모습으로 돌아온 비결이 뭐냐고 많이 물었어요. 그런 질문을 받으면 뭐랄까, 자존감이 이렇게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느낌이 들죠. 스스로가 더 좋아지는 거예요.”

지난달 20일 경기도 군포에 위치한 직장인 연극단 ‘창연’ 연습실에서 단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승훈(47)씨가 독백 연습을 하고 있다. 김수연 제공

경기도 군포에 위치한 직장인 연극단 ‘창연’에서 3년째 활동하고 있는 약사 이승훈(47)씨는 처음엔 실용적인 목적으로 직장인 연극에 발을 들여놓았다. 뭉개지는 발음과 사투리 억양을 고치고 싶었다. 아픈 이들에게 약의 효능을 설명해야 하는 승훈씨에게 이 약점은 잦고도 불편한 걸림돌이었다. 고민을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극단의 주요 단원으로 자리잡은 승훈씨에게 연극은 “누구에게나 적극 추천하고 싶은 경험”이다. 분명하게 말하는 방법뿐 아니라 다양한 사람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즐거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오타쿠 역할을 맡았죠. 진짜 오타쿠처럼 보이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어요. 말투를 어눌하게도 연습해보고, 여러 영상들을 보면서 호흡도 짧게 끊어보고요. 정말 기억에 남고 즐거웠던 기억이에요.”

‘창연’의 창작 뮤지컬 ‘미스터리 소녀’ 공연의 한 장면. 창연 페이스북 갈무리

직장인 극단에 들어오면 일단 신입 단원들은 발성·자세·표정 등 기본기를 연습한다. 지난달 20일 방문한 창연의 연습실에서는 1개월차 신입 단원인 동형욱(43)씨가 빈 무대를 보며 발성을 연습하고 있었다. “1은 1이요, 2는 2요, 3은 3이요.” 숫자가 올라갈 때마다 형욱씨 목소리의 크기도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분노의 감정을 숫자의 크기에 실어보기도 했다. 연극을 처음 시작하는 이들은 이렇게 글로만 쓰인 대사에 생명을 불어넣는 법을 천천히 배워간다.

연극이 좋다, 사람이 좋다

‘아해’ 연습실에서 단원들이 대사가 적힌 종이를 보며 대사 리딩 연습을 하고 있다. 스튜디오 어댑터 염서정

연극 활동을 처음 시작하는 이들이 초기에 정신없이 빠져드는 것 중 하나는 ‘관찰하기’다. 버스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혹은 텔레비전 토론회에 나오는 정치인들까지 유심히 보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과 표정을 기억하려 애쓴다. 경주마에게 씌워졌던 눈가리개가 벗겨진 것처럼 시야가 크게 확장되며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다. 중국요릿집 요리사인 형욱씨는 “진짜 재밌는 건 제가 이젠 사람들 얼굴을 보고 다닌다는 것”이라며 “예전에는 휴대폰에 얼굴을 박고 다녔다면 이제는 다르다. 다른 사람의 표정을 유심히 본다. ‘어떤 표정을 지을까? 팔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이렇게 관찰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인 극단은 대개 연초에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홍보를 하며 단원을 모집한다. 극단 아해의 경우 해마다 20명 안팎의 신입 단원을 맞이한다. 물론 모든 이들이 끝까지 가는 건 아니다. 42기인 혜련씨의 경우 15명이 함께 입단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이들은 7명이다. 그래도 함께 시작해 성장하며 같은 길을 걷는 동기가 있다는 건 큰 힘이 된다. 단원을 상시 충원을 하는 직장인 극단도 있다.

2008년부터 극단 아해에 몸을 담았던 이찬령(47)씨는 오랜 기간 극단원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사람’을 꼽았다. “제가 워낙에 말도 잘 못 하고, 사무직이라는 직업 특성상 약간 말소리도 작았어요. 처음 왔을 때 좁은 연습실에서 스물몇명이 다 붙어 앉아서, 여기저기서 한명씩 어색하게 자기소개를 했던 순간이 아직 기억나요. 부끄럽고 그랬는데, 이 부끄러움조차 되게 재밌게 느껴졌어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이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게 되게 고맙기도 했었고.”

무엇보다 연극 하나만을 바라보고 모인 사람들이 뿜어내는 특유의 에너지가 찬령씨를 잡아끌었다. “직장인 연극이긴 하지만, 우린 사실 서로의 직장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다만 직업이 달라도 연극이라는 대상에 열정을 쏟는 건 같잖아요? 물론 만날 연극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우리가 올릴 극이나 배역에 대한 토론으로 열띠게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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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오르는 단 이틀 위해 열정 불살라

2020년 ‘아해’가 신입 회원 훈련 이후 했던 워크숍 공연 사진. 아해 인스타그램 갈무리

1978년에 창단한 아해는 지금까지 81회의 정기공연을 열었다. 매년 열리는 근로자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포함한 단체상을 23차례 수상한, 실력까지 갖춘 직장인 연극단이다. 아해는 어쩔 수 없이 꿈을 포기해야 했던 이에게는 다시 꿈을 실현하게 해주는 통로이기도 하다. 대학로 대표 연극 ‘라이어’의 연출자이자 연극 작가인 신영은(41)씨는 아해 출신이다. 올해로 18년째 아해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그에게 직장인 연극은 생계라는 파도 속에서도 꿈으로 가는 길을 잃지 않게 해준 등대와 같다. 대학 때 연극을 공부하기는 했지만, 막상 졸업 뒤 바로 연극판으로 뛰어들 용기는 없었던 그는 지인의 가게에서 옷을 팔았다. 그런 그에게 직장인 연극은 돈을 벌면서도 연극을 놓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일을 그만두고 막상 연극을 하려니 너무 무서운 거예요. 처음 와서 ‘내가 가진 재능으로 연극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직장인 연극단에 오면서 수많은 분들한테 많은 도움을 받았죠. 제가 가진 건 작았지만, 여러 단원들과 함께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 정말 큰 용기를 주었어요. 한 5~6년 정도 여기 극단 생활을 계속하면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어요. 결국 대학로로 나와서 아예 연출을 시작했죠. 그게 벌써 10년 전이에요.”

극단 아해는 영은씨에게 초심을 돌아보게 하는 곳이다. 이제는 어엿한 연극 연출자가 됐지만 그는 여전히 아해를 떠나지 않는다. 연출을 하기도 하고 극본을 쓰기도 한다. “직장인 연극은 말 그대로 이미 직장이 있는 사람들이 연극을 하는 거니까, 이분들은 연극에 대한 동경심을 아직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상당히 열정적으로 하시거든요. 뻔한 말 같지만, 이런 ‘순수한 열정’이 직장인 연극의 가장 큰 매력 같아요. 사실 따지고 보면 순수한 열정을 담아서 하는 일들이 세상엔 그렇게 많진 않거든요.”

‘아해’ 단원들이 다른 단원의 표현 연습을 지켜보고 있다. 몇 가지 제시어를 주고 자유롭게 짧은 이야기를 만들어 표현하는 것은 신입 단원 교육 프로그램 중 하나다.

이처럼 직장인 연극단을 찾는 이들은 다양하다. 막연히 연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오는 이들도 있고, 승훈씨처럼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도 있다. 혹은 혜련씨나 영은씨처럼 학창 시절 동아리나 전공 경험을 갖고 다시 무대를 찾는다. 직장인 연극단을 찾는 이들을 설명하는 열쇳말은 ‘식지 않은 열정’이다.

직장인 연극단은 전국 여러 곳에 다양하게 분포돼 있다. 아마추어 연극인 만큼 운영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부침이 심하기도 하다.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1997년에 전국직장인연극단체협의회(직연협)가 결성됐다. 직연협에는 현재 아해를 비롯해 놀이터(서울 강남구), 일상탈출(서울 용산구), 좋은사람들(서울 성북구), 청년(서울 영등포구), 페르소나(서울 관악구), 함바꿈(경기 부천시) 7개 극단이 참여하고 있다. 서로 공연을 단체관람하기도 하고, 모꼬지·연합공연·체육대회 등을 통해 친목을 다지고 있다.

이들은 무대에 오른 자신을 관객들이 숨죽여 바라보는 상황에서 배역에 완전히 몰입해 감정을 토해내며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자랑한다. 작품을 무대에서 선보이는 그날을 위해 자신을 쏟아붓고 달라진 나를 발견한다고 문성환 직연협 회장은 설명한다.

“막상 극이 올라가는 것은 단 이틀이죠. 그러나 이 이틀을 위해 몇개월을 수많은 사람들이 열정을 쏟아요. 공황장애를 가지고도 연습을 하다가 쓰러지는 분도 있었어요.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어요. 빛나는 짧은 시간을 위해 여러 사람이 함께 울고 웃는 경험은 어디서도 얻기 힘든 것이죠. 확실히 연극을 시작하면서 스스로 더 사랑하게 되고, 자존감도 높아지는 것 같다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우리는 연극 안에서 함께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김수연 라이프콘텐츠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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