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이 삶에 지칠 때 필요한 것···‘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오마주]
‘오마주’는 주말에 볼 만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콘텐츠를 추천하는 코너입니다. 매주 토요일 오전 찾아옵니다.
‘복싱 영화’ 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줄거리와 장면들이 있습니다. 옛 영광을 상징하는 트로피와 수많은 선수들의 땀에 절어 낡은 체육관, 늙고 고집스러운 관장, 불우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젊은 복서…. 왓챠에서 볼 수 있는 일본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첫인상 역시 그렇습니다.
얼핏 복싱 영화의 클리셰를 가져온 듯 한 이 영화는 몇 가지 지점에서 전형을 벗어나며 새로운 감동을 줍니다. 게이코는 청각 장애가 있는 여성입니다. 호텔의 메이드로 일해 돈을 벌면서 프로 복서로도 데뷔한 상태입니다. 청각 장애가 있으면 심판의 지시나 코치의 조언을 들을 수 없어 링 위에서도 불리합니다. 리치가 짧고 스피드도 느립니다. 게이코는 아랑곳하지 않고 훈련을 거듭합니다. 많은 남성 복서들이 같은 체육관에 다니지만, 게이코는 그 누구보다 성실히 연습하는 듯 보입니다.
이 오래된 복싱장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복싱장을 운영해온 연로한 관장은 건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면서 연습생이 줄어 복싱장의 운영도 어려워졌습니다. 관장은 복싱장의 문을 닫기로 했다고 알립니다. 이미 상대가 잡힌 경기는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다만 게이코는 복싱장이 문을 닫기 전 이미 복싱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상태입니다. 영화는 게이코가 복싱장을 떠나기로 한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습니다. 호텔 청소와 복싱을 병행하는 데 지쳤는지 모릅니다. 신체적 조건의 불리함을 이겨나가는 데 어려움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이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습니다. 매일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매일 같은 직장에서 일하고, 매일 같은 연인을 만나 데이트를 하더라도, 이런 생활에 큰 문제는 없더라도, 갑자기 삶이 피곤해지는 그런 날입니다.
원하는 학교에 합격하지 못하거나 직장에서 해고당했을 때만 삶이 힘든 것은 아닙니다. 매 순간 삶의 의지를 강렬히 불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조금씩 지치고 피곤해지고 언젠가 그만두고 싶어집니다. 게이코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신의 페이스대로 살아왔지만, 결국은 조금씩 지쳐갑니다.
게이코가 그대로 글러브를 벗었다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슬프지만 쉽게 잊힐 영화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게이코가 가족이나 코치의 죽음, 악랄한 상대의 등장에 각성해 복싱을 다시 시작했다면 다소 뻔한 영화가 됐을 겁니다. 게이코는 링 위로 돌아옵니다. 떠날 결심을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계기는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게이코를 지킨 것은 ‘루틴’이었습니다. 게이코는 빠지지 않고 열심히 훈련 일지를 썼습니다. 관장의 부인은 입원한 남편을 문병 왔던 게이코가 남긴 훈련 일지를 읽습니다. 일지에는 날짜, 날씨, 그날의 훈련, 훈련 후 느낌이 성실히 적혀 있습니다. 로드워크 10㎞, 섀도 3라운드, 미트 3라운드, 위빙 2라운드…. 훈련 구성은 매일 조금씩 달라지지만, 게이코는 그 모든 것을 성실히 적습니다. 호텔 청소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기 직후라 잔뜩 상처 난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열심히 일합니다.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쉬면 루틴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Small, Slow But Steady’입니다. ‘소소하게, 느리게 하지만 꾸준하게’는 바로 게이코가 복싱과 삶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이제는 거의 사라진 16㎜ 필름으로 촬영한 영화입니다. 매직아워(일출 직후 혹은 일몰 직전의 수십분)의 도쿄를 아름답게 담아낸 야외 촬영, 창틀을 넘어 들어온 햇빛에 부유하는 먼지를 잡아낸 실내 복싱장에선 필름 영화의 아우라가 느껴집니다. 실제 청각장애 여성 복서의 책을 바탕으로 제작됐습니다. 차세대 일본영화를 이끌 주역 중 하나로 평가받는 미야케 쇼가 연출했습니다. 주연 기시이 유키노는 게이코 역으로 지난해 일본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올해의 엔딩’ 지수 ★★★★★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아름다운 엔딩
‘루틴이 필요해’ 지수 ★★★★ 나의 삶을 지키는 루틴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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