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거품경제 당시 주가도 넘은 日, '잃어버린 30년' 탈출?

경수현 2024. 3. 9.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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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 반도체 산업 부활에 전력…한국 경제엔 위기 요인 될 수도

  (도쿄=연합뉴스) 경수현 특파원 = 일본 증시에 훈풍이 불고 있다. 도쿄 증시의 대표 주가지수인 닛케이225 평균주가(닛케이지수)는 지난달 22일 '거품 경제' 시기에 기록한 종전 최고치를 약 34년 2개월 만에 갈아치운 데 이어 이달 4일에는 사상 처음 40,000선까지 돌파했다.

닛케이지수 40,000선 돌파 (도쿄 AFP=연합뉴스) 일본 증시의 대표 주가지수인 닛케이225 평균주가(닛케이지수)가 사상 처음으로 40,000선을 돌파한 지난 4일 주가 전광판. 2024.03.04 kjw@yna.co.kr

올해 들어 닛케이 지수 상승률은 지난 8일 현재 18.6%에 달한다. 한국 증시의 대표 지수인 코스피가 0.9% 오른 것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주가는 당장의 기업 실적과 함께 미래 기대치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최근 도쿄 증시 강세는 장기 침체에 빠진 일본 경제의 미래에 대한 시장의 긍정적인 평가로도 받아들여진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도 지난 4일 국회에서 "일본 경제 변혁의 발소리에 시장 관계자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에 마음 든든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1990년대 이후 일본 경제는 거품이 터진 뒤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말처럼 그동안 장기 정체에 빠져 신음해왔다. 이에 따라 태평양전쟁 후 산업 부흥에 성공해 한동안 세계 2위를 자랑하던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2010년 중국에 밀려났고 지난해는 독일에도 뒤지면서 세계 4위로 떨어졌다. 과거 주요 선진국 중에서도 최고의 소득 수준을 보였던 일본인들의 1인당 GDP도 지난 2022년 3만3천863달러로 한국(3만2천142달러)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다.

최근 높아진 일본 증시 주가도 장기간 추이를 살펴보면 30여년간 잃어버린 공백을 메운 수준이다. 지난 8일 닛케이지수는 거품 경제 때 최고치인 1989년 말과 비교해 2%가량 올랐을 뿐이다. 이 기간 미국 뉴욕 증시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는 14배 수준으로 상승했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적용받는 한국 증시의 코스피 지수도 4.7배로 뛰어올랐다.

일본 증시에서는 최근 가파른 주가 상승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아마도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 탈출을 아직은 자신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지난해 일본 기업들의 견실한 실적 등도 엔화 약세에 힘입은 바가 작지 않다. 엔화 약세는 2012년 재집권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경제 정책인 '아베노믹스'의 영향이 크다. 아베노믹스는 금융완화, 재정지출, 성장전략이라는 3개의 화살로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해 경제를 재도약시키려 하는 정책이다.

이 가운데 마이너스 금리 등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금융 완화 정책은 현재 진행형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부작용 우려 때문에 도저히 처방할 수 없는 정책이다. 통화를 발행해 정부 국채를 떠안는 식의 정책이 지속 가능하지 않음은 명확하다. 이에 따라 도입 초기에는 이처럼 장기간 지속되리라고는 예상하기도 어려웠다. 다만 일본은행은 서서히 출구 전략을 모색하는 모양새다. 금융시장에서는 일본은행이 마이너스 금리를 3월이나 4월에 해제할 것이라는 예상이 퍼지고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7일 "일본은행이 이달 18∼19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마이너스 금리 해제 등 정책 수정을 결정할 것이라는 관측이 시장에서 확산하고 있다"고 전했다. 게다가 어쩌면 가장 중요한, 마지막 화살인 성장전략에 의한 생산성 향상 성과는 그동안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글로벌 금융위기 등 불운이 겹친 탓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 일본 정부 관료나 경제인들의 입에서는 '모처럼 잡은 기회'라는 얘기가 나온다. 무엇보다 '냉전 시대'를 방불케 하는 미·중 대립 등 지정학적 변화가 새로운 기회 요인으로 꼽힌다. 미국이 반도체 등 중요 물자의 공급망을 재구축하면서 일본에 유리한 환경이 펼쳐지고 있다. 일본이 한국전쟁 이후 냉전 시대에 군사적인 비용을 별로 부담하지 않고 미국의 전략적인 요충지로 선택받아 경제를 고속 성장시켰듯이 '신냉전'도 우호적인 환경으로 작용한다는 평가다.

우선 일본 정부는 1980년대 자국 기업이 세계 시장의 절반가량을 차지했던 반도체 산업 부활에 전력을 쏟고 있다. 지난달에는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1위 업체인 대만 TSMC의 공장이 구마모토현에서 개소식을 했다. 일본 정부 주도로 설립된 라피더스는 IBM과의 인력 교류 등 미국 측 협력을 받으면서 최첨단인 2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의 반도체 양산 계획을 추진 중이다. 일본 정부는 2021년 '반도체·디지털 산업전략'을 수립하고 이에 맞춰 그동안 약 4조엔의 예산을 확보하는 등 반도체 부활에 돈을 퍼붓고 있다. 아베노믹스의 마지막 화살인 성장전략이 새로운 환경에서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반영된 듯하다.

일본 증시의 최근 강세도 반도체 관련주가 주도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반도체 제조장비 기업인 도쿄일렉트론 주가는 올해 들어 51.9%나 올랐다. 최소한 증시에서는 일본 반도체 기업의 장래를 밝게 보고 있다는 얘기다.

만일 일본이 반도체 산업 부활에 성공한다면 한국 경제에는 위기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한국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탈출에 손뼉 치면서 구경만 할 입장이 아니다. 공교롭게 지난해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외환위기 때였던 1998년 이후 25년 만에 일본에 뒤처졌다. 한국도 세계정세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하면서 생산성과 경쟁력 향상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ev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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