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 “아기 분유 타려고 구한 물로 차 대접받아…눈물 왈칵”

조일준 기자 2024. 3. 9.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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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커버스토리
정우성 UNHCR 친선대사
레바논 ‘시리아 난민 가족’의 환대
평범한 삶 잃은 이들 방문 10년째
“끝이 있을까? 무력감도 느끼지만
관심 절실하기에 공부하고 준비”
정우성 유엔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가 지난달 21일 콜롬비아 남부 국경도시 이피알레스에서 에콰도르로 건너가는 루미차카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UNHCR 제공

올해는 배우 정우성씨가 유엔난민기구(UNHCR)와 인연을 맺은 지 꼭 10년째다. 2014년 5월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는 그를 첫 한국인 명예사절로 위촉했다. 이듬해 6월 유엔난민기구 본부는 그를 최초의 한국인 친선대사로 임명했다. 그동안 정 대사는 네팔·남수단·레바논·이라크·방글라데시·예멘·폴란드 등의 강제 실향 상황 현장에서 마음을 보탰다. 지난달 18일부터 23일(이하 현지시각)까지 콜롬비아와 에콰도르 방문은 열번째 현장 미션이었다. 정 대사는 빼곡하게 짜인 엿새간의 일정 내내 온 마음을 기울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한겨레는 그의 현장 방문을 단독 동행취재했다.현지 일정이 모두 끝난 마지막날(지난 2월23일) 저녁 식사 자리와 귀국길 공항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관련기사= 먹고살기 힘들어 국경 넘은 뒤…‘함께 살기’ 배우며 꿈꾸는 미래

“제국주의가 난민 사태로 이어지고…”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를 맡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어렸을 때 서울 달동네 중에서도 맨 위쪽에 살았어요. 철거와 이사를 반복했죠. ‘나중에 돈을 벌면 재단을 만들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지’ 생각했는데, 일에 쫓기다 보니 자꾸 미뤄지게 되더군요. 그러던 참에 제안이 왔어요. 처음엔 당혹스러웠죠. 난민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고 유엔난민기구가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망설일 이유가 없었어요.”

―올해로 활동 10년째입니다. 본인에겐 어떤 의미의 일인가요?

“10년 전의 저나 지금의 저나 마음은 똑같죠. 달라진 게 있다면, 세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방문지에 대해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도 알게 되고요. 어느 때는 ‘이건 끝이 없는 일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죠. 세계의 난민 수는 계속 늘어나는데 ‘내가 뭘 할 수 있지?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이런 무기력감. 그래서 미션을 나올 때마다 자문해봐요, 사람들을 만날 준비가 됐는지. 그렇게 미션을 마치고 돌아오면 ‘잘 나갔어. 계속해야지’ 마음먹게 돼요. 제가 만난 사람들이 그걸 입증해줘요.”

―가장 기억에 남는 방문지는 어디인가요?

“가장 충격적이었거나 감동적이었거나 특별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느냐는 물음일 텐데, 난민은 그렇게 비교할 수 없어요. 지역마다 난민 발생의 원인과 실상이 다르고 저마다 절박한 이야기가 있으니까. (2016년에) 레바논에서 시리아 난민들을 만났을 때예요. 제가 소셜미디어로 라이브 중계를 하다가 갑자기 울음이 터졌어요. 한 난민 가족이 저에게 보여준 환대가 생각난 거죠. 그 가족은 아주 어린 아기가 있었어요. 분유를 타 주려면 깨끗한 물이 필요하고, 그 물을 날마다 어딘가에서 구해와야 해요. 그런데 ‘손님이 왔다’며 아기 분유 물로 저한테 차를 대접해준 거예요. 그게 너무 가슴에 와닿고 미안했던 거죠.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오히려 저한테 계속 ‘감사하다’고 했어요. 어떤 도움을 받아서가 아녜요.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어준 게 감사하다는 거예요. 무엇보다 세상의 관심이 절실한 거죠.”

정우성 유엔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가 지난달 22일 에콰도르 오타발로에서 베네수엘라 실향민 어린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UNHCR 제공

―난민과 강제실향민의 이야기를 수없이 듣다 보면 트라우마가 생기진 않나요?

“상상하기도 힘든 큰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서 제 트라우마를 말하는 건 적절치 않은 것 같아요. 미션을 할 때마다 ‘아,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구나’라는 생각을 해요. 언제부턴가 주변에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요. ‘지금 우리가 당연한 것처럼 즐기고 누리는 것들 있잖아, 이거 당연한 거 아냐. 감사한 거야.’ 난민과 실향민도 누구나처럼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것을 바라고, 자신을 더 아름답게 가꾸고 싶어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죠. 그런데 그 모든 꿈과 노력이 폭력 사태로 갑자기 사라져버리고 제로베이스에 서게 됐잖아요. 저는 난민을 만나면서 세상에 대해 더 많이 배웁니다. 과거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의 후유증이 어떻게 현재 난민 사태까지 이어지는지 공부하게 되고, 더 크게 세상을 이해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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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적 목소리 이해…휩쓸리진 말아야”

―한국은 난민 인정률이 매우 낮고 난민에 대한 편견이나 거부감도 큰 편입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 때문일 수 있어요. 남한과 북한은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두꺼운 국경을 맞대고 있고, 한국은 사실상 섬나라잖아요. 타국과의 국경이라는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난민 수용에 일방적 이해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 수 있어요. 경계심이나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죠.”

―난민에 대한 악의적 왜곡과 공공연한 혐오 표출까지 인정할 순 없지 않나요?

“그게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거라고 봐요. 낯선 것에 대한 경계심은 인간 본성이고, 난민에 대한 찬반 논리도 끊임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근대 계몽의 시대에는 선각자가 길을 제시하고 이끌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보통 사람이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양에 한계가 뚜렷했지만, 지금은 정보가 넘치고 자기 생각도 뚜렷하잖아요. 표현의 자유 안에서 정치적 올바름과 인격적 품위를 지켜가는 것, 그 테두리 안에서 묵묵하게 자기 길을 걷는 게 중요하죠.”

―한국에선 2018년 제주 예멘 난민 사태 때 “국민이 (난민보다) 먼저다”라는 난민 수용 반대 구호가 이성적 논의나 인도주의의 당위성까지 잠식할 정도였습니다.

“굉장히 자극적으로 잘 만든 구호 같아요.(웃음) 그런데 난민과 국민을 갈라놓는 것은 국가 대 국가의 적대적 관계를 전제하고 난민을 대상화하는 거잖아요.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강요하는 건 자기가 힘이 있다는 우월의식에서 나오는 폭력이죠. 일등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무시하는 일등제일주의이거나 모두가 균질하게 같아야 한다는 건데, 그게 곧 파시즘이잖아요. 모든 사람이 다 최고일 때 그 사회가 더 다양하고 아름답고 풍성해지잖아요. 최고가 하나뿐인 사회는 얼마나 불행합니까?”

―다양함과 공존에 대한 사회적 합의 수준이 중요해 보입니다.

“타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 혐오를 없애기 위해서는 ‘남이 나와 다른 것처럼, 나도 남과 다르다’는 걸 인정하면 돼요. 누구나 측은지심이 있잖아요. 우리는 이미 그런 마음의 자세가 돼 있어요. 어떤 집단이 이해관계에 따라 극우적인 목소리를 높이는 건 단지 자신들의 신념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에요. 저는 그들이 왜 그러는지도 이해하려 해요. 다만 우리가 거기 휩쓸리면 안 되죠.”

앞서 그는 2019년에 친선대사 5년의 경험을 담은 책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원더박스 펴냄)을 펴내면서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누구라도 난민촌에서 난민들을 만나 직접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사실과 유엔난민기구의 역할에 의문을 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회가 누구에게나 보장되는 건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내게는 무척 큰 행운이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 내가 이런 확신을 갖기까지 특별한 경험과 시간이 필요했음을 알기에, 이런 생각을 섣불리 강요하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충분한 대화이다.”

에콰도르/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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