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은 내 것”…미 대선판에 열린 ‘판도라의 상자’ [이정민의 워싱턴정치K]

이정민 2024. 3. 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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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떨어뜨린 배아'가 불러온 '폭탄'…냉동 배아는 인간인가

2020년 미국 앨라배마주. 한 병원의 불임클리닉 초저온실에 들어온 무단 침입자가 배아 보관 용기에서 냉동 배아를 꺼내 가려고 했습니다. 보안은 어떻게 뚫었고 목적이 뭐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손을 대는 순간 환자의 손이 동상에 걸리며 배아가 들어있던 시험관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안에 있던 배아들은 훼손됐습니다.

아기를 기다리며 배아를 보관한 부부 세 쌍은 미성년자 과실치사법으로 소송을 냈지만 모두 기각됐습니다. "체외 배아는 '사람' 또는 '아동'이 아니니 부당한 사망에 따른 청구가 제기될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지난달 16일 일어났습니다. 앨라배마주 대법원이 원심을 깨고 부부들의 손을 들어준 겁니다.

2024년 2월 16일 “냉동 배아도 사람”이라고 판결한 앨라배마주 대법원의 판결문 (사진=AP)


전례 없는 판결에서 대법원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도 아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 발달 단계와 신체적 위치, 기타 부수적인 특성에 근거해 예외를 적용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특히, 톰 파커 대법원장은 판결문에서 법 조항 뿐 아니라 성경을 인용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기 전에도 신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를 파괴하는 건 신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게 파커 대법원장의 주장입니다. 앨라배마주 대법원은 미국 내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법부, 공화당 성향으로 분류됩니다.

■ 지역마다 다른 '배아=인간'의 기준…"예상치 못한 폭탄"

미국의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앨라배마 법원 판결을 두고 "예상치 못한 폭탄이었다"고 썼습니다. 비난의 화살이 공화당으로 날아갔기 때문입니다. 보수 공화당 의원들은 낙태반대론자가 많고, 미국의 낙태반대론은 자연적으로 잉태된 배아도 인간으로 생명을 가진다는 논리에 기반합니다. 배아도 인격체라는 겁니다.

2022년 6월, 미국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미 연방대법원의 낙태 금지 판결 반대 집회. 전국적으로 수천 명이 모였다. (촬영=KBS)


이 논리에 힘입어 2022년 보수 대법관이 3분의 2인 미국 연방대법원은 낙태권을 인정했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49년 만에 뒤집었습니다. 1973년 판결인 '로 대 웨이드'는 수정헌법 14조의 권리 주체인 '사람'에 태아는 해당하지 않으며, 헌법이 보장하는 사생활의 권리에 임신 중지가 포함된다고 본 판결인데, 2022년 대법원은 임신 중지 권리가 헌법 어떤 조항에 의해서도 보호받지 않는다며 반대의 판단을 한 겁니다.

이후 약 2년간 이 판결에 힘입어 공화당 우세 주에서는 낙태를 원천 금지하기 위한 법 제정이 꾸준히 이뤄져 왔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붉은색이 진할수록 낙태를 강경하게 반대하는 지역입니다. 낙태를 원천 금지하는 주가 14곳에 달합니다.


문제는 자궁에 착상되지 않은,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배아의 경우입니다. 낙태반대론자들 간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당장 낙태를 강하게 제한하는 주들끼리도 '어느 범위까지 배아가 인간인가'에 대해 판단이 다릅니다. 낙태를 전면 금지한 미주리주는 40년 전부터 "수태된 순간(배아)부터 인간"으로 정의하는 데 반해, 임신 6주 이하의 낙태만 허용하는 조지아주는 "자궁에 있는 모든 발달 단계의 호모 사피엔스"로 인간의 범위를 좀 더 좁게 규정합니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생존 가능한 배아를 폐기하는 것 자체를 법으로 금지한 건 루이지애나주 한 곳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공화당 의원들은 처음엔 앨라배마 판결의 의미를 알지도 못한 채 환영했다가 맹비난을 받고 입장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공화당 유력 대선 후보인 트럼프 전 대통령은 판결 이후 이틀이나 입을 닫고 있다가 "냉동 배아 시술은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경선 후보였던 니키 헤일리도 "배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가 뒤에 말을 바꿨습니다.


■ 소환된 2022 중간선거 악몽…"내 몸은 내 것" 반발에 낙태 언급 자제

공화당 의원들의 애매한 입장 표명엔 2022년 중간선거의 악몽이 깔려 있습니다. 민주당이 선거에서 질 거란 예측이 팽배하던 당시, 공화당 우세 지역들은 낙태를 몇 주 이내의 단기에만 가능하도록 제한하거나 아예 금지하며 지지자를 결집시켰습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압도적 승리를 기대하던 공화당은 예측과 달리 상원을 탈환하지 못했고, 하원에선 이겼지만 적은 표 차였습니다. 강경한 낙태 반대 정책에 "내 몸은 나의 것"이라며 맞선 여성들의 반대가 불러온 역풍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공화당 일부 지역에서 채택한 강경한 낙태 금지책의 부작용들이 알려지며 민심 이반을 불러왔습니다. 임산부의 건강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이거나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인 경우에도 낙태를 금지한 탓입니다. 2022년 5월 미국 오클라호마주가 낙태 전면 금지를 법으로 정했을 당시 이 법 제정을 주도했던 공화당 소속의 짐 올슨 주 하원의원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강간은 끔찍한 범죄이지만 그로 인한 처벌 대상이 아기여서는 안된다. 엄마의 건강이 나빠도 마찬가지"라고 답한 바 있습니다.

2022년 6월, 오클라호마주의 낙태 금지법 제정으로 문을 닫게 된 오클라호마 털사 여성 클리닉 (촬영=KBS)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에 예외를 두는 5개 주가 있긴 하지만 경찰에 신고해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사무엘 딕먼 박사 등이 지난 1월 미국 의학협회 저널에 낸 논문에 따르면 이 지역의 성폭력 임신 신고율은 21%에 불과해 사실상 실효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낙태가 금지된 주에서 강간으로 인한 임신은 6만 4천 건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공화당 의원들의 낙태 반대는 신념이기도 하거니와 선거에서 집토끼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부정하기 힘든 명제입니다. 이 때문에 공화당은 낙태 반대에 대해 가급적 언급을 자제하면서 정치적 반발을 줄일 방안을 찾고 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조차도 '낙태 금지의 기준을 어디까지로 할 건가'에 대한 답을 명확히 하지 않고 있을 정도입니다.

대신 냉동 배아 시술에 대해선 "시술에 찬성한다"며 적극 방어에 나서는 분위깁니다. 냉동 배아 시술에 대한 긍정 여론이 부정을 압도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 정부 당시 백악관 보좌관이었던 여론조사 전문가 켈리앤 콘웨이는 전국 공화당 상원위원회에 보낸 메모에서 "여성의 86%를 포함한 전체 응답자의 무려 85%가 불임 관련 시술과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 확대를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 반전 기회 만든 민주당…"트럼프는 여성과 가족에 위험한 사람"

낙태는 반대해야 하는데 냉동 배아까지 반대하긴 힘든 공화당의 딜레마는 그래서 관련 사안이 불거질 때마다 엇박자가 두드러집니다. 앨라배마주 판결과 맞물려 공화당 의원 125명은 '생명 잉태법'에 대한 지지를 표했습니다. '인간'의 정의가 "수정 혹은 복제의 순간을 포함한다", "태어나고 태어날 모든 인간의 생명권은 동등하게 보호받아야 한다"는 법안입니다. 앨라배마주 판결에 반대한다면서 똑같은 논리의 '생명 잉태법'은 지지한다고 미국 뉴욕타임스는 비판했습니다.

이 틈을 노린 민주당의 공세는 거셉니다. 낙태 금지를 반대하는 민주당의 논리는 '여성과 태아는 헌법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진보적 관점에 근거합니다.시험관 시술로 두 자녀를 임신한 민주당 태미 더그워스 상원의원은 앨라배마 판결 직후 시험관 아기 시술 및 다른 보조생식기술(Assisted Reproductive Technology ART)에 대한 전국적 접근권을 보장하는 법안을 냈다가, 공화당 신디 하이드-스미스 의원에게 저지당했습니다. "너무 법적 범위가 넓어서 독소로 가득 찬 법"이라는 게 하이드-스미스 의원의 주장인데, 이에 더그워스 의원은 "여성의 의료와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뺏으려는 공화당의 운동은 시험관 아기 시술까지 위험에 빠뜨릴 거"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시험관 시술의 전국적 접근 보장 법안으로 맞부딪힌 민주당 태미 더그워스 상원의원(좌)과 공화당 신디 하이드-스미스 상원의원(우) (사진=AP)


경제나 외교정책, 이민이나 물가 등 어느 것 하나 시원한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임신중지권과 여성 관련한 정책들에선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는 민주당과 바이든 대통령에겐 반전 기회가 생긴 겁니다. MSNBC의 정치 저널리스트 아나 마리에-콕스는 "주변적 법률 이론으로 시작된 공화당의 논리가 이제 공화당 정치인들을 도덕적 한계에 가두게 됐다"며 "태아에게 모체와는 별개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순간 태아가 어디에 있든 어떻게 생겨났든 그 권리를 옹호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민주당은 이번 대선에서 아예 낙태 문제를 전략의 중심에 놓겠다는 계획입니다. 해리스 부통령은 지난달 스펙트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낙태 문제가 11월 대선의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보다 미국국민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영부인 질 바이든 여사도 "트럼프는 전국적인 낙태 금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 여성과 우리 가족에 위험한 사람"이라는 연설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래픽: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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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기자 (mani@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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