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만에 '회장'으로…신세계 정용진 승진에 대한 몇 가지 질문
'쿠팡-알리'에 정면 돌파…정용진 회장 체제로 경쟁력 강화 계획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혁신 나서겠다" 선언
신세계그룹이 '리더'를 바꾸는 대대적인 결정을 했다. 그간 신세계그룹을 이끈 이명희 회장은 총괄회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정용진 부회장이 신임 회장으로 올라섰다.
다만, 일각에서는 정 회장의 승진이 신세계그룹의 인사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나온다. 신세계는 그간 '신상필벌'을 앞세워 정기인사를 단행해 왔기 때문이다. '철저한 성과능력주의'가 그룹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고 강조해온 것도 같은 이유다.
정 회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신세계그룹은 지난해 처음으로 쿠팡에 역전당하며 1위 자리를 내주는 등 사업 성과가 좋지 않아서다. 그럼에도 정용진 회장이 '직접 등판'한 것은 오너만이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인사는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대응하고, '쿠팡-알리' 체제로 굳혀지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인식이 깔린 결정이다.
격변하는 환경 속 전면에 나서는 정용진
정용진 신세계그룹 총괄부회장이 지난 8일 회장으로 승진했다. 2006년 부회장에 오른 후 18년 만의 승진이다.
정 회장은 지난 2006년 정기 임원인사에서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신세계 측은 "경영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범위에서 변화와 혁신의 실천 의지가 확고했다"라며 "회사의 비전을 주도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을 엄선해 승진시켰다"고 밝혔다.
그간 신세계그룹이 '성과주의' 원칙을 강조해온 만큼 이번 인사는 이례적이다. 지난해 정기 임원이사에서 대표 6명 가운데 5명을 교체하는 결정을 내렸을 때도 "변화와 쇄신, 시너지 강화, 성과총력체제 구축에 초점을 맞춘 인사"라며 "앞으로도 철저한 성과능력주의 인사를 통해 그룹의 미래 준비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세계그룹이 매년 임원인사 때마다 강조한 것도 '신상필벌'과 '성과주의·실력주의'다. 성과가 없으면 연차가 쌓여도 승진하지 못하지만 실력이 있다면 나이, 성별에 상관없이 그 누구라도 승진할 수 있다. 엄정한 평가를 통한 신상필벌 원칙을 철저히 적용해야 기업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고, 그룹의 미래도 준비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일각에서는 이같은 원칙이 이번 인사에 적용됐는지 의견이 나온다. 문제는 정 회장이 승진할 때마다 이 같은 지적이 나온다는 점이다.
2006년 상황도 비슷했다. 정용진 당시 부사장은 정기 임원이사에서 두 단계 높은 부회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는데 이를 두고 '실력 검증'에 대한 의문이 나오기도 했다.
부회장 시절, 신세계 성과는
정용진 회장이 부회장으로 지낸 기간은 2006년부터 2024년까지 18년이다. 그간 정 회장은 신세계그룹의 신사업 발굴에 주력해 왔다. 주요 성과로는 △창고형 할인점 '트레이더스' 도입(2010년) △간편가정식 피코크 론칭(2013년) △가성비 PB(자체제작 브랜드) 노브랜드 론칭(2015년) △복합쇼핑몰 스타필드 도입(2016년) 등으로 꼽힌다.
정 회장은 트레이더스 오픈 직후인 2011년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주주들과 만나 "국내 최고의 유통기업으로 성장하겠다"고 약속하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트레이더스는 출범 6년 만에 매장을 11개까지 늘리고, 매출 1조원을 돌파하며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피코크 역시 정 회장이 주도한 프로젝트로, 현재 매출 4000억원이 넘는 메가 브랜드로 성장했다. 2013년 냉동냉장 간편가정식 200여개 상품으로 시작한 피코크는 지난해 간편가정식뿐만 아니라 음료, 과자 등으로 확대돼 1000개가 넘는 상품을 출시하고 있다.
노브랜드는 가격과 품질만 남기고 브랜드마저 없앴다는 원칙으로 출시된 이마트 PB 상품으로, 현재 노브랜드 상품군은 농산, 축산, 수산 등 신선식품부터 생활용품, 가전까지 확대됐다. 약 1500여개 상품 운영 중이며, 총매출은 1조원을 크게 웃돈다.
2016년 9월 하남에서 처음 선보인 스타필드도 정 회장이 주도한 사업이다. 스타필드는 원데이 쇼핑, 레저, 힐링의 복합 체류형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도입된 모델이다. 당시 정 회장은 "스타필드 하남은 발명가, 혁신가의 관점에서 신세계그룹의 모든 유통 비결을 집대성해 콘텐츠, 상품, 서비스를 정교하게 준비했다"라며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모든 사업이 성공한 것은 아니다. △드럭스토어 분스(2012년) △H&B(헬스앤뷰티)스토어 부츠(2017년) △가정간편식 매장 PK피코크(2018년) △B급 감성 잡화점 삐에로쑈핑(2018년) △주류브랜드 제주소주(인수 2016년) △프리미엄 마트 PK마켓(2016년) 등은 사업을 철수, 현재 진행하지 않고 있다. 영화 제작 사업을 위해 2018년 시작한 일렉트로맨도 지난해 철수했다.
가장 큰 문제는 실적 악화와 업계 영향력 쇠퇴다. 이마트는 지난해 연결 기준 469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2011년 인적분할한 이후 첫 영업손실이다. 순손실은 1875억원이다. 신세계그룹은 부동산 경기 침체에 따른 신세계건설의 사업 악화를 원인으로 꼽았지만 그룹의 핵심 사업도 좋지 못하다.
이마트 별도 기준 영업이익은 2022년 2589억원에서 지난해 1880억원으로 줄었다. 특히, 이마트의 핵심인 할인점(이마트) 영업이익이 같은 기간 1787억원에서 929억원으로 크게 감소했다. 자회사인 △이마트24 △에브리데이 등의 영업이익이 줄었으며, △SSG닷컴 △G마켓 등은 여전히 영업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결국, 이마트는 코로나19 이후 크게 성장한 쿠팡에 밀려 유통업계 1위 자리까지 내줬다. 쿠팡은 지난해 매출 31조8298억원과 영업이익 6174억원을 기록했다. 이마트 매출은 29조4772억원에 그쳤다. 백화점 사업을 하는 신세계의 매출(6조3570억원)과 합산할 경우 여전히 신세계그룹의 매출 규모가 쿠팡을 앞서지만 업계에서는 쿠팡의 성장세가 빨라 신세계그룹 전체를 추월할 가능성도 크다는 의견이 나온다.
위기에 중요해지는 '오너'의 역할
그럼에도 정 회장이 승진한 것은 어려울수록 오너의 역할이 커지기 때문이다.
특히, 오너는 단시간 내 성과를 내야 하는 탓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업을 추진하기 어려운 전문경영인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 또, 오너경영 체제에서는 신속하면서 빠른 의사결정이 가능해 시장 환경이 급변할 때일수록 필요성이 커진다.
신세계그룹은 이번 인사에 대해 "정용진 회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을 정면돌파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날로 경쟁이 치열해지는 유통 시장은 과거보다 훨씬 다양한 위기 요인이 쏟아지고 있다"라며 "그만큼 강력한 리더십이 더욱 필요해졌다"고 덧붙였다.
경영 상황이 부정적일 때 오너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은 해외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사례다. 미국의 자동차회사 '포드'는 1976년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했지만 2001년 시장점유율이 급감하고 일본 토요타에 밀리는 등 회사 창립 98년 만에 최악의 경영 상황에 처하자 오너 경영 체제를 강화했다. 당시 포드 창립자인 헨리 포드의 증손자인 윌리엄 클레이 포드 2세 당시 회장이 최고경영자(CEO) 역할까지 도맡게 됐다.
도요타도 2009년 도요타의 창업자인 도요타 기이치로의 3세인 도요타 아키오 당시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키면서 '오너 경영 체제'를 강화했다. 당시 도요타는 글로벌 경기 불황으로 창업 이래 처음으로 영업적자를 기록하는 등 위기 상황에 직면하자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닛케이비즈니스 등 현지 언론은 "강력한 리더십과 치밀한 결속력을 발휘해 불황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시의적절한 조치"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신세계그룹도 같은 전략이다. 쿠팡, 알리익스프레스 등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는 상황에서 타이밍을 놓칠 수 없다는 판단으로 정 회장을 승진시켰다. 실제 유통업계는 쿠팡의 점유율 확대, 중국 앱의 국내 진출 등으로 급변하고 있다. 앱/리테일 분석 서비스 와이즈앱·리테일·굿즈에 따르면 중국 쇼핑 플랫폼인 알리익스프레스, 테무, 쉬인의 앱 사용자 수가 지난 2월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특히, 알리익스프레스는 2월 사용자 818만명을 기록하며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종합몰 앱' 순위에서 단숨에 2위로 올라섰다. 신세계그룹의 G마켓은 알리익스프레스, 테무 등에 밀려 5위에 그쳤다.
이에 신세계그룹은 정 회장을 구심점으로 삼아 업계 1위 탈환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 이번 인사에 대해 '강력한 리더십의 필요'를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올해 정 회장은 시장 변화를 선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하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제2의 스타필드 등의 신사업 발굴뿐만 아니라 이마트 등 주력 사업의 경쟁력 강화 방안을 강구한다. 앞서 정 회장은 올해 신년사를 통해 "올해는 매우 도전적인 한해가 될 것"이라며 "기존의 시스템과 방식으로는 우리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 올해는 우리가 1등이 맞느냐는 물음에 분명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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