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묻힌 상흔의 역사 우직하게 파헤치는 맛에 ‘파묘든다’[위근우의 리플레이]
*영화 <파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풍수학과 항공우주공학, 어쩌면 오컬트 영화 <파묘>의 세계관은 전혀 달라보이는 이 둘 사이의 교집합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2월22일 개봉해 10일 만에 600만 관객을 돌파(지난 3일 기준)하며 고속 흥행 중인 <파묘>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풍수사 김상덕(최민식)은 의뢰인에게 자신의 딸이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했으며 자기 일도 그와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그에게 땅이란 과거 우리의 선조부터 자신, 미래 세대가 죽고 흙으로 돌아가 쌓이는, 말하자면 모든 인과가 누적되는 공간이다. 음양오행의 법칙을 비롯한 풍수지리의 비법은 이 보이지 않는 인과의 흐름을 읽어내 길흉화복에 개입하는 일이다. 항공우주공학이 공기의 흐름과 중력 등 존재하지만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변수를 계산해 하늘과 우주라는 미지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처럼. 오컬트 장르는 인간의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해한 영역을 다룬다. 다만 그 불가해함이 결국 우리가 끝끝내 알 수 없을 카오스의 영역인지,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세계에도 법칙이 있느냐에 따라 방향과 전망은 완전히 갈리며, 엄밀히 말해 오컬트는 후자다. 하여 풍수학과 항공우주공학의 유사성에 대한 상덕의 허세 섞인 설명은 적어도 <파묘>의, 더 나아가 장재현 감독의 전작이자 역시 오컬트 장르로 분류되는 <검은 사제들> <사바하>의 세계관에 대한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이들 작품이 불가해할 만큼 거대한 인과론적 세계에서 개인의 선택이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탐구한다는 점에서. 그런 면에서 <파묘>는 또 다른 한국 오컬트 흥행작인 나홍진 감독의 <곡성>과 비교해볼 만하다. 두 작품을 줄 세워 평가하려는 건 아니다. 두 작품은 오컬트의 문법을 경유해 불가해한 운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미리 말하면 나는 이 비교를 통해 <파묘>의 오컬트 영화로서의 몇 가지 장점이 더 잘 드러나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것이 <파묘>가 <곡성>보다 좋거나 잘 만든 작품이란 뜻이 아니란 것도 미리 말해둔다.
기록적 흥행에도 불구하고 <파묘>를 장재현 감독의 최고작으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무당 이화림(김고은)의 대살굿 장면은 에너지가 넘치고 온몸에 법문을 새긴 신세대 법사 윤봉길(이도현)의 모습은 매력적이지만, 전체적으로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미술은 <검은 사제들>과 <사바하>에 더 많다. 특히 영적이고 그 유래를 파악하기 어려운 존재들이 등장하며 미지에 대한 공포와 긴장감을 고조시켰던 전작들과 달리 <파묘>에선 그림자가 있을 정도로 실체화된 정령이 등장해 오컬트 장르 특유의 신비감을 떨어뜨린다. 일제강점기 시절 쇠말뚝으로 한국의 지맥을 끊으려던 일본 음양사의 사술을 파헤치고 일본 군국주의 망령 같은 귀신과 싸우는 과정 역시 <사바하>와 비교해 선과 악, 피해와 가해 구도가 너무 명확하고 단순하다. 그럼에도 오컬트 영화로서 <파묘>의 특징은 뚜렷한데, 풍수와 무속, 금강경 등 서로 다른 유래를 지닌 신비학과 종교가 협업해 혼자서는 절대 막을 수 없는 강력한 악을 상대해낸다는 것이다. 다양한 학제 간 연결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것이야말로 신비계의 항공우주공학인 셈이다. 많은 이들이 <파묘>에서 소설 <퇴마록>을 연상하는 것도 이 지점일 게다. 귀신이 있던 자리에 당연히 쇠말뚝이 있으리라는 예상이 어긋나고 일본 귀신에게 패배하기 직전, 귀신이 쇠말뚝 자체임을 깨달은 상덕이 음양오행의 법칙에 착안해 물(정확히는 피)에 젖은 나무 몽둥이로 귀신의 달궈진 철갑을 가르는 장면은 말하자면 ‘우리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라는 <인터스텔라> 대사의 심령학적 버전이다.
풍수·무속 다양하게 연결된 학제
‘절대 악’ 상대한다는 명료한 설정
사건 모조리 설명한 돌직구 연출
찜찜함도 신비감도 남기지 않고
‘책임’ 등의 문제 뚜렷하게 드러내
해석 여지 많은 ‘곡성’ 결말과 대조
보이는 세계 이면에 대한 호기심
역사 앞 시민들의 책임 깨닫게 해
잘 설계된 ‘오컬트’ 진가 보여줘
물론 오컬트를 경유해 미지의 영역에서 해답을 찾아내는 서사로 희망적 감정을 남긴다는 것이 작품의 완성도와 성취를 증명하진 않는다. 반례로 나홍진의 <곡성>은 <파묘>와 전혀 다른 방향의 길을 선택하지만 한국 오컬트 영화의 수작으로 꼽히며 비평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여기서 주인공 전종구(곽도원)는 귀신에 씐 딸을 구하기 위해 굿도 벌이고 모든 사달의 원인으로 의심되는 일본에서 온 외지인(구니무라 준)을 때려잡으러 가는 등 온갖 난리법석을 피우지만 모든 시도는 실패한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힘이 개입했다는 걸 느끼고 그에 대한 여러 가설을 세우지만 그 가설들은 모두 틀린다. 잘해보려 한 모든 시도가 실은 하나같이 잘못된 선택이었고, 그 끝에 종구가 맞이하는 파국적 결말은 인간의 무력함과 운명의 무자비함에 대한 공포 혹은 공허를 남긴다. 수많은 서사적 모호함의 중첩 끝에 거대한 심연을 본 듯한 <곡성>의 경험에 비해 <파묘>는 순진하거나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곡성>과 비교할 때 오컬트로서 <파묘>의 정직함은 더 돋보인다. 앞서 불가해한 영역을 제시하되 그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없으면 오컬트라 보기 어렵다고 했지만 <곡성>은 오컬트가 맞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진 몰라도 악마와 일광의 계획은 성공했기 때문이다. 법칙은 있다. 단지 종구가 모르고 관객이 모를 뿐이다. 그리고 <곡성>은 노골적으로 종구와 관객을 무지의 방향으로 현혹한다.
얼핏 <곡성>은 반전의 반전처럼 보인다. 외지인의 사술과 대결하는 것처럼 보이던 박수무당 일광(황정민)은 외지인과 한통속이고, 흑막처럼 보이던 외지인은 현지인들에게 핍박받는 무고한 피해자가 되는 듯했지만 실은 흑막이 맞았으며, 우리 편 같았던 무명(천우희)은 실은 흑막인 악령인가 싶었는데 우리 편이 맞았다. 그러니 종구도 관객도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곡성>에 반전은 없다. 반전이란 진실 너머의 진실이다. 가령 <파묘>에서 친일파 조상의 묘가 험지에 있어 의뢰인 가족이 고통받는 것도 진실이지만, 그 묘가 그 밑에 매장된 일본 귀신의 관을 숨기기 위한 술책이었다는 건 그 너머의 진실이다. 원인으로 보였던 것이 실은 결과라는 것. <곡성>은 이와 달리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유추하거나 결과로부터 원인을 더듬어갈 경로를 의도적으로 뒤섞어버린다. 종구 패거리에게 린치를 당하다가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외지인을 보며 그가 악마라고는 조금도 생각하기 어렵다. 자연스레 관객의 의심은 무명을 향한다. 범박하게 요약해 종구는 끊임없이 어리석은 선택만 하며 파국에 이르지만, 정작 관객은 그것이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없도록 나홍진은 트릭을 쓴다. 대체 왜 이토록 많은 이들이 죽어나가야 했는지 영화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고, 하다못해 왜 외지인의 집에 종구 딸의 신발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관객은 이 무력한 상태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이것을 감독의 기막힌 현혹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관객이 영화로부터 소외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오컬트는 이런 소외에 대한 영화와 관객의 좋은 알리바이가 된다. 마치 너무 신묘해 이해할 수 없는 필연적인 법칙이 우릴 이끈 것처럼.
오컬트를 이루는 수많은 요소들, 주문과 굿과 부적과 구마사제와 예언서 등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다스리고 극복하기 위한 가상의 지식 체계다. <곡성>은 이런 요소들을 가져다 화려하게 연출하지만 대체 어떤 의미를 갖고 어떤 작동을 하는지에 대해선 괄호를 친다. 이 지식은 오직 종구의 선택들이 오답이라는 걸 보증하는 형태로만 제시되기에 오답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건 없다. 반면 <파묘>는 이 지식 체계로 영화 속에 벌어진 일을 모조리 설명하려 한다. 찜찜함은 남지 않지만 신비감도 남지 않는다. 다만 주인공들의 선택과 책임에 대한 문제는 훨씬 뚜렷해진다. 기복(祈福)과 주술적 맥락이 이미 전제된 파묘라는 행위로부터 땅에 겹겹이 묻힌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을 연역해낼 때 앎에 대한 책임 역시 드러난다. 혹자는 일본 귀신과 싸우는 후반부를 반일이나 민족주의 담론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본질적인 건 미지에 가까울 정도로 이 땅에 깊고 거대하게 누적된 인과를 도도한 역사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보이는 세계 이면의 규칙을 알고 싶다는 오컬트의 욕망은 땅에 파묻힌 역사적 상흔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며, 영적 세계에 대한 전문가인 상덕과 화림은 역사 앞에서 책임을 지닌 시민이 된다. <곡성>이 보이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해괴한 파국을 필연으로 받아들이도록 보이지 않는 세계를 필요로 한다면, <파묘>는 보이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의 진짜 책임 소재를 묻기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끌어오는 셈이다. 무엇에 더 매혹될지는 취향과 관점의 차이지만, 적어도 후자가 우리에게 왜 가상으로서의 오컬트가 필요한지 더 잘 설명해준다는 걸 부정하긴 어려워 보인다. 영적 세계에 대한 항공우주공학으로 잘 설계된.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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