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칼럼] ‘저 黨 찍었다간 나라 亡하겠다’에 다시 갇힌 한국
선거가 ‘나쁜 선택’과 ‘더 나쁜 선택’의 경쟁 되면 나라 기울어
한국 유권자들은 지난 20년 가까이 저 당(黨)을 찍으면 나라가 망(亡)할 것 같아 이 당(黨)을 찍었다. 이쪽이 돼야 나라가 더 잘되고 국민이 더 잘살 것이란 확신을 갖고 표를 던진 게 아니었다. 그러곤 얼마 안 가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는 끔찍한 진담 같은 농담이 나돌았다. 저 당을 찍었더라면 나라가 왕창 거덜났을지도 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미국이 모양이 이렇다. 3년 반 전 트럼프 시대를 악몽(惡夢)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바이든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지금 바이든 시대에 몸서리치던 유권자들이 트럼프를 에워싸고 있다. 이 기세라면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더 커진다.
오르막 나라 유권자는 ‘좋은 선택’과 ‘더 좋은 선택’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호사(豪奢)를 누린다. ‘나쁜 선택’과 ‘더 나쁜 선택’의 막다른 골목으로 쫓기는 게 내리막 나라 유권자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지식산업 패권과 세계 최강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도 미국 하늘에서 밝아오는 새벽 놀이 아니라 저무는 저녁놀을 보는 듯한 것은 정치 혼란 때문이다.
미국은 큰 나라고 강한 나라다. 폭삭 주저앉지 않는다. 영국의 지난 100년은 패권 국가 쇠퇴의 역사다. 그런데도 소련처럼 곤두박질치며 산산조각 나지 않았다. 로이드 조지(1차 세계대전), 윈스턴 처칠(2차 세계대전)같은 조종사들이 나라 핸들을 쥐었던 덕분이다. 망했다 일어서고 또 망했다 또다시 일어서는 나라도 있다. 독일과 일본이다. 그들을 ‘유럽의 병자(病者)’ ‘세계의 병자’라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을 거듭 무안하게 만들었다. 그 나라에도 세계 정세를 정확히 읽었던 정치가가 있었다. ‘망하지 않는 나라’ ‘망해도 다시 일어서는 나라’라는 것은 대단한 ‘국가 브랜드 파워(Brand Power)’다.
이승만은 식민지로 망한 터에 공산주의 물결을 막아내는 방파제(防波堤) 국가를 세웠다. 박정희는 금고(金庫) 안에 먼지밖에 쌓인 게 없는 나라를 부자 국가로 일으켜 세웠다. ‘공칠과삼(功七過三) 평가 이론’을 적용하면 위대한 정치가다. 좌파 진영에서 김대중을 그 반열에 올리려 한다 해서 굳이 인색하게 대할 게 없다. 우파 지도자 인맥이 쇠(衰)하고 좌파 지도자 인맥은 단절(斷切)돼 버린 것이 우리 정치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국 유권자는 이번 총선에서도 ‘저 당을 찍었다간 나라가 아주 망하겠다’는 걱정을 벗지 못했다. 선거 날이 다가오면서 ‘걱정’은 ‘공포’로 변해간다. 민주당 안에선 2개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보이는 전쟁’과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보이는 전쟁은 ‘현재 권력’ 이재명 세력과 ‘과거 권력’ 문재인 세력과의 대결이다. 둘은 본래 끼리끼리 노는 사이였지만 권력 앞에서 비슷한 것끼리 더 미워하는 근친(近親) 증오 관계로 변했다. 현재와 과거가 부딪치면 승패는 물으나 마나다.
이 과정에서 이재명 대표가 앞으로 걸어갈 길이 대충 드러났다. 총선에서 져도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 8월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다시 쥐는 것이 목표다. 그러기 위해 혹시 총선 후 되살아나 당권에 도전할지도 모를 과거 세력 잔당(殘黨)까지 모조리 소탕하고 있다. 이 전쟁은 끝이 다가왔다.
민주당의 근본을 바꾸는 것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전쟁 목표는 당에서 김대중과 노무현의 그림자를 지우는 것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이재명의 민주당’에겐 계승해야 할 유산(遺産)이 아니라 끊어내야 할 멍에고 족쇄가 됐다. 겉으론 레닌을 받들면서 속으론 지워갔던 스탈린 권력 장악 과정과 닮았다. 두 사람 냄새는 당사에 사진을 걸어두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판단이다.
이재명 대표는 그렇게 마련한 공간에 진보당·경기동부연합·한총련 세력을 불러들였다. 진보당의 모체(母體)는 전쟁이 벌어지면 국내 기간 시설을 파괴해야 한다고 논의하다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해산된 통진당이다. 경기동부연합은 국군 감축(減縮)과 한미 동맹 해체 운동을 계속해 온 주사파의 인력 공급 수원지(水原地)다. 제주 해군 기지 건설 반대, 한미 FTA 저지 운동을 벌였다. 이 대표는 그들을 이용한다 생각하고 그들은 이 대표를 이용한다고 생각하는 관계다.
결국 유권자들은 이번에도 ‘좋은 선택’과 ‘더 좋은 선택’ 사이에서 고민하는 호사를 누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성큼 손이 나가지 않는 선택’과 ‘절대로 하기 싫은 선택’ 사이에 다시 갇혔다. 동트는 나라에서 새벽 놀을 본 게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에 그저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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