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눈
[아무튼, 레터]
무대에 한옥 한 채가 있다. 노부부 ‘장오’와 ‘이순’은 손자를 위해 마지막 남은 재산인 이 집을 팔고 떠나야 한다. 새로운 주인은 집을 부수고 3층짜리 건물을 올릴 계획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부부는 겨우내 묵은 문창호지를 새로 바르며 일상을 지속한다.
배우 오현경의 부고(訃告)를 접하고 이 연극 ‘3월의 눈’(배삼식 작·손진책 연출)이 떠올랐다. 오현경은 장오를 연기했다. 장오는 요양원으로 가야 할 처지다. “자네 넋은 어디 두고 몸만 남았는가. 나는 집을 잃었구.” 그러니까 이순과는 이미 사별한 상태다. 일꾼들이 문짝과 마루를 쿵쾅쿵쾅 뜯어낼 때 가슴이 서늘해진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집에 봄눈이 내린다.
대중에게 오현경은 1987~1993년 방송된 드라마 ‘TV 손자병법’의 만년 과장 이장수로 기억된다. 부하 직원들에게는 큰소리치지만 상사에겐 아양 떨고, 아내가 “이번엔 승진 하나요” 물을 땐 밤하늘을 보며 한숨 쉬던 가장이었다. 중간관리직의 허풍과 비애를 희극적으로 그려냈다. 이장수의 단골 레퍼토리는 “내가 말이야, 왕년에…”로 시작하곤 했다.
유튜브에서 ‘TV 손자병법’ 1화를 재생했다. 제목이 ‘챤스를 잡아라’. 이장수(오현경)는 부하직원들을 태워 회사로 출근했다. 카풀이었다. 그가 운전을 하면서 유비에게 말한다. “자네도 결혼을 해야지. 벌써 서른둘 아닌가?” 그때는 서른두 살이 노총각이었다. 부서 전체에 컴퓨터가 한 대뿐이고 사무실에서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우는 등 흘러간 옛 풍경에 눈길이 갔다.
오현경의 영결식이 지난 5일 대학로에서 연극인장으로 열렸다. 고인의 육성이 담긴 연극 ‘봄날’의 일부가 흘러나왔다. 자식들에게 절대권력처럼 군림하는 아버지와 그에게 반역을 꾀하는 자식들을 자연과 인생의 이야기로 풀어낸 작품. 오현경은 젊은 배우들을 압도하는 화술을 들려줬다. 인생도 연극처럼 커튼콜 박수소리와 함께 소멸했다.
그의 좌우명은 ‘분수를 알고 체면을 지키자’였다. 배우로서의 자존심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얼굴을 상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밀려드는 광고를 한 편도 찍지 않았다. “누구나 한 가지쯤 지키고 싶은 게 있지 않느냐”던 그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이 배우가 ‘3월의 눈’처럼 우리 곁을 떠났다.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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