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료 없인 기술도 무용지물… 배터리 전쟁 ‘소금사막’서 시작된다
물질의 세계
에드 콘웨이 지음|이종인 옮김|인플루엔셜|584쪽|2만9800원
영국의 언론인인 저자는 취재차 방문한 금광에서 “도살장을 둘러보기 전에 푸짐한 육류를 즐긴 사람이 된 기분”에 사로잡혔다. 결혼을 앞두고 마련한 금반지 하나를 만들기 위해 광석 20t을 캐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였다. “아내의 다이아몬드가 분쟁 지역에서 온 건 아닌지 열심히 확인해 놓고 이 금이 어디서 왔는지는 알아볼 생각조차 못했다.”
이 경험이 그를 물질(物質)의 세계로 이끌었다. 세상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와 문명을 지탱해 온 물질을 모래, 소금, 철, 구리, 석유, 리튬으로 분류했다. 각 물질이 어디서 어떻게 채굴되는지, 어떤 경로를 거쳐 우리의 일상에 도달하고 어떻게 세상을 바꾸고 있는지 추적했다.
◇물질은 문명의 뼈대
여섯 물질을 선정한 기준에 대해 “현대 사회의 필수 요소를 구성하며 즉각적인 대체재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 물질이 이 여섯 가지뿐인지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섯 물질의 필수적 성격은 부정할 수 없다.
가령 모래를 녹여 만드는 유리는 전쟁의 판도를 좌우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적국 독일에 쌍안경 공급을 은밀히 요청할 만큼(영국의 고무가 필요했던 독일이 수락했다) 밀렸던 렌즈 기술을 거의 따라잡고도 2차 대전 때 또다시 고전했다. 모래를 수입하던 프랑스 채석장을 독일이 점령했기 때문이었다. 모래는 흔하지만 정밀한 렌즈의 재료가 될 만큼 순도 높은 모래는 그만큼 흔치 않아 지정학이 개입한다. “기술은 습득해도 원료는 만들어낼 수 없다.” 현대 사회를 움직이는 반도체 소재인 실리콘(규소) 역시 모래에서 얻는다.
소금을 전기분해해서 얻는 염소는 진정제·항우울제·항생제를 만드는 데 쓰인다. 석유는 합성수지·접착제·비료의 원료가 된다. 철이 현대 사회의 골격을 이루고 모래 섞인 콘크리트가 살을 붙인다면, 구리로 만든 전선과 회로는 전기와 신호를 전달하는 신경계에 해당한다. 탄소 배출을 줄이고 친환경 발전(發電)으로 전환하는 데도 막대한 양의 구리가 필요하다. “구리 없이는 탄소 중립의 청사진을 실현할 수 없다.”
태초에 빅뱅으로 생성돼 오늘날 배터리 소재가 된 리튬은 소금 사막의 염호(鹽湖)에서 소금물을 증발시켜 얻는다. 리튬 성분이 충분한 염호가 드물고 시간도 오래 걸리기 때문에 여러 나라와 기업들이 ‘스포듀민’이라는 암석에서 리튬을 추출하는 기술 개발에 뛰어들고 있다. 유용한 물질에 대한 욕구는 인간을 움직이는 강력한 원동력이다. 자원 확보를 위한 경쟁은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다.
◇최첨단 기술도 원시적 물질로 실현
대만 TSMC 공장을 둘러보며 질문을 던진다. 왜 대만은 반도체 제조에 성공하고 중국은 실패했을까. 이어 ‘타이밍’ 가설을 제시한다. 1960~1970년대 미국에 건너간 대만 유학생들은 인텔 등에 취업해 반도체 기술을 배우고 돌아왔다. 반면 중국이 유학생을 보낸 1990~2000년대엔 미국 산업의 중심이 소프트웨어로 넘어간 뒤였다. 이후 중국에서 텐센트를 비롯한 인터넷 서비스 업체가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이 화면 안에서 이루어지는 ‘비(非)물질 시대’처럼 보인다. 땅에서 뭔가를 캐내는 일은 구식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화면 뒤에서 세계는 점점 더 물질에 의존하고 있다. 가장 첨단의 기술도 원시적 물질 덕에 실현된다. 가령 TSMC에서 스마트폰 반도체를 만들려면 용광로에서 석영을 녹여 실리콘 덩어리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후 웨이퍼에 회로를 레이저로 인쇄하기까지 수백 개의 기업이 참여한다. 그중 한두 곳만 사라져도 스마트폰 생태계는 무너진다. 생소한 기업 이름들로 빽빽하게 채워진 공급망은 현대인이 잘 몰랐던 일상의 이면이자 현대 사회의 실체다.
냉전이 끝나자 자유로운 원자재 거래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됐다. 그러나 최근 자국 중심주의가 대두하면서 세계는 다시 비축 경쟁으로 접어들고 있다. 저자는 물질의 글로벌 공급망이 너무 복잡해서 그것을 해체하거나 한 국가가 전적으로 통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선진국들이 공급망 장악을 위해 나서는 상황이 자원을 찾기 위해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던 19세기를 연상시킨다고 지적한다. 이 책이 그려낸 방대한 글로벌 공급망은 경이롭지만 그만큼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전쟁 등으로 어딘가 연결 고리가 끊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국처럼 자원이 부족한 나라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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