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법 밖의 노동자, 프리랜서 400만명
창간 104주년 공동 기획
‘12대88의 사회를 넘자’
[4] 이름만 ‘자유로운 전문직’
경기 안산시에 사는 김민선(40·가명)씨는 10년 차 프리랜서다. 2015년 육아와 일을 병행하려고 직장을 그만뒀다. 요즘은 그림 등을 사용해 온라인 강의 동영상의 줄거리를 짜는 일로 월 100만원을 벌어 살림에 보탠다. 그는 “아이를 잘 돌봤던 행복한 10년이었지만, 불공정 계약, 단가 후려치기 등 숱한 ‘갑질’과의 싸움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한국 노동시장은 대기업 정규직 12%와 중소기업, 비정규직 등 나머지 88%로 쪼개져 따라잡기 어려운 격차가 나타나고 있다. 이 이중 구조가 기업에 속한 임금 근로자의 격차라면,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채 사실상 방치된 또 다른 수백만의 근로자 집단이 있다. 우리가 ‘프리랜서’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프리랜서는 원할 때 일하고 일한 만큼 버는 화려한 면만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 시장 논리에 따라 차별화한 자기 경쟁력으로 연 수억원을 버는 스타 프리랜서도 꽤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육아를 하거나 부족한 생활비를 보충하려고 프리랜서가 된 평범한 사람들이다.
한국 노동 시장에 존재하는 중요한 한 축이지만 이들은 노동법 밖에 있다. 근로기준법은 ‘사업주와 종속적 관계에 놓여 지휘·감독에 따르는 사람’을 근로자로 보는데,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일이 많아서다. 프리랜서가 국내에 얼마나 있는지 공식적으로 집계하는 곳도 없다. 노동 정책을 연구하는 ‘일하는시민연구소’는 2022년 기준 국내 프리랜서 규모가 약 406만5000명이라고 추정한다.
현행 노동법과 기업의 울타리, 각종 복지로 보호받는 사람들과 다른 ‘법 밖의’ 프리랜서는 한국 노동시장에서 또 하나의 이중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프리랜서 중에는 기업의 하청을 받아 일하면서 영세 기업 근로자나 비정규직이 겪는 것 이상의 불공정한 대우와 복지 공백을 견뎌야 하는 사람이 상당수다.
전태일재단은 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프리랜서의 경력을 증명할 수 있는 시스템이나, 시중노임단가 적용 업종 확대 여부를 적극적으로 논의해 최소한의 보호 장치를 늘려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서울 강남구에 있는 온라인 콘텐츠 제작 회사에 다닐 때 김민선(40)씨의 출퇴근 시간은 왕복 3시간이었다. 임신 당시 김씨는 정규직이었지만 서른 명도 안 되는 회사라 야근도 잦고 육아휴직 등이 어려운 환경이었다고 한다. “재택근무를 주로 하며 아이를 잘 키우는 게 프리랜서를 시작한 이유였다”고 했다.
직장을 다닐 때 200만원 수준이었던 김씨의 수입은 프리랜서를 하면서 4분의 1 수준인 월 50만원 선으로 줄었다. 대학 계약직 교직원으로 일하는 남편 수입 250만~300만원과 합해 빠듯하게 살림을 했다. 처음 몇 년은 아이가 커지는 모습을 매 시각 눈에 담으며 ‘프리랜서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말이 좀 느렸던 아이가 7살이 되던 해, 자폐성 장애 진단을 받았다. 하루 4시간 정도였던 일하는 시간을 8시간으로 늘려 수입을 100만원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김씨와 남편이 버는 돈을 합치면 많아야 월 400만원쯤이지만, 지금 9살인 아이에게 미술 치료, 언어 치료, 특수 체육 교육 등으로 월 150만원 안팎이 들어간다. 정부나 지자체가 지원하는 것을 뺀, 김씨 부부가 부담하는 몫이다. 생활비 등을 빼고 나면 한 달 50만~60만원 정도 저축한다. 김씨는 “프리랜서는 소득 증명이 쉽지 않아 급할 때 대출받기 어려워서 현금을 잘 모아놔야 한다”고 했다.
정작 김씨를 힘들 게 하는 건 육아가 아니다. 김씨가 하는 일은 10만~20만원짜리 소액 일감이 많다. “지금 회사 형편이 나빠졌는데 좀 이따 주겠다”며 입금을 미루거나 아예 돈을 떼먹는 일이 반년에 1~2번씩은 일어난다. 단가 후려치기도 일상이다. 김씨는 대기업 등으로부터 콘텐츠 제작을 하청 형태로 의뢰받는 업체와 주로 계약을 하는데, 과도한 수수료를 떼 간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원래 원청 회사가 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발주를 얼마에 하는지 뻔히 아는데 중간 업체에서 지나치게 많은 수수료를 떼 간다”면서 “60만원짜리를 35만원으로, 20만원짜리를 10만원으로 깎는 것도 봤다”고 했다. 그는 “항의를 하면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다’는 식의 답이 돌아온다”고 했다.
지방고용노동청 등에 신고해도 해결이 어렵다. 원청의 지휘·감독을 받는 근로자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야 부당노동행위 여부를 판정해주기 때문이다. 박현호 경기비정규직지원센터 소장은 “노동청 절차가 워낙 복잡해서 민사 소송을 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데 체불 임금 수십만원 때문에 소송하느니 포기하는 프리랜서가 많다”고 했다.
아이 셋을 키우는 서울의 9년 차 프리랜서 요가 강사인 박미숙(53·가명)씨는 매달 자기가 일하는 지역의 시설관리공단 산하 복지관 등 5곳을 돌아다니며 급여 명세서를 떼는 게 일이다. 급여가 정확하게 입금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올 초 한 기관은 70만원을 줘야 하는데 60만원만 줬다. 박씨가 확인하기 전까지 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박씨는 “법적으로 정식 근로자가 아니라 급여 명세서를 떼 줄 의무가 없다더라”면서 “명세서 달라고 하면 ‘선생님, 요즘 돈 부족해요?’ 같은 핀잔만 돌아온다”고 했다.
19년 차 일본어 통·번역 프리랜서 정모(49)씨도 “경력이 오래돼 나름 인정을 받고 있지만 아직 돈을 떼먹히는 일을 겪는다”고 했다. 통역 업계는 통상 통역사를 원하는 기업 A사가 중간 업체인 에이전시(기획사) B사에 일감을 의뢰하면, B사가 통역사와 기업을 연결해 주는 식으로 일한다. 일이 끝나면 A사가 B사에 대금을 지급한다. 그럼 B사는 중간 마진을 뗀 남은 금액을 통역사에게 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간 업체가 잠적하거나, 대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는 일이 흔하다는 것이 정씨를 비롯한 업계 얘기다.
☞12대88 사회
12대88은 국내 전체 임금 근로자의 12%인 대기업 정규직(260만명)과 나머지 88%인 중소기업, 비정규직 근로자(1936만명)로 나뉜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상징한다.
☞프리랜서(freelancer)
일정한 소속 없이 일감 계약을 근거로 자유롭게 일하는 사람을 보통 가리킨다. 중세에 특정 영주에게 소속되지 않은 채 자유롭게(free) 창(lance)을 들고 싸우던 용병을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했다. 근로기준법은 ‘사업주와 종속적 관계에 놓여 지휘·감독에 따르고 있는지’를 판단해 법적인 근로자로 본다. 프리랜서는 여기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석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특별취재팀>
팀장=정한국 산업부 차장대우
조유미 사회정책부 기자, 김윤주 사회정책부 기자, 김민기 스포츠부 기자, 한예나 경제부 기자, 양승수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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