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이승만의 ‘독립전쟁,’ 뉴욕타임스에 코리아의 진지 구축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24회>
지금도 한국의 학계, 교육계, 언론계, 문화·예술계엔 김일성의 항일 투쟁은 흔쾌히 인정하면서 이승만의 외교 독립운동은 악의적으로 폄훼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나치식 이미지 조작과 공산당식 선전·선동으로 이승만을 악마화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의 유튜브 조회수가 200만을 넘어섰다는 점이 그 점을 웅변한다.
조선노동당과 남측 주사파의 선전과는 정반대로 김일성의 항일 투쟁은 한 꺼풀만 벗겨보면 역사 왜곡, 증거 날조, 거짓 선전, 허위 선동으로 가득한 정치 신화에 불과하다. 김일성 항일 투쟁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한 서재진 전 통일연구원 원장의 기념비적 저술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통일연구원, 2006)에 따르면, 북한은 조직적으로 중국 동북항일연군의 역사를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으로, 중국공산당의 역할을 김일성 당 조직의 성과로, 중공 주요 군사 지휘자의 업적을 김일성의 위업으로 바꿔 치는 황당무계한 역사 조작을 자행했다.
반면 이승만 항일 독립운동은 숱한 증거물을 통해서 누구나 직접 맨눈으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 당장 인터넷 뉴욕타임스의 검색 창에 “Syngman Rhee”라고 이승만의 영문 이름을 치면, 관련 기사들을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기사들 하나하나가 이승만 독립운동의 발자취다. 그중에서도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46세의 이승만이 전 세계를 향해 벌였던 대한 독립 홍보전은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장면이다.
뉴욕타임스, 이승만의 예언 주목
1919년 1월 26일 <<뉴욕타임스>> 일요판은 “코리아, 윌슨에게 자유 호소(Korea Appeals to Wilson for Freedom)”라는 제목으로 한국 독립운동 관련 특집 기사를 2면에 걸쳐 게재했다. 3.1운동이 발발하기 33일 전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 중이던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 대통령은 한국 대표단으로부터 한국의 자치권을 고려해 달라는 해외전보(cablegram)를 받았다. 기자는 바로 첫 문단에서 한국 대표단 중엔 윌슨 대통령이 프린스턴 대학 총장이던 시절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윌슨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이승만이 속해 있음을 특별히 강조한다.
한인 대표단의 나머지 두 명은 이승만의 배재학당 동문 민찬호(閔燦鎬, 1877-1954)와 정한경(鄭翰景, 1890-1985)이었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는 1918년 12월 뉴욕에서 개최된 제2차 소약속국(小弱屬國) 동맹회의에 세 사람을 파견하려 했으나 하와이에 있던 이승만은 참석할 수 없었다. 이어서 세 사람은 1919년 1월 18일부터 열리는 파리 평화 회의에의 참석을 시도했으나 미국은 이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승전국으로 회의에 참석하는 일본을 고려한 처사였다. 참석이 불발되자 이들은 윌슨 대통령을 향한 외교적 로비를 시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장문의 특집 보도로 한국의 입장을 집중 조명했는데, 정확한 배경을 알 순 없으나 기사 내용만 뜯어봐도 이승만의 주도적 역할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경복궁 근정전, 세종로에서 보는 북악산, 독립문 등 세 장의 커다란 사진을 담은 이 기사는 전편에 걸쳐서 한국 독립의 역사적 당위성과 외교적 중대성을 한국 편에 서서 지극히 우호적으로 기술했다. 이 기사는 특히 일본이 한국의 식민화에 머물지 않고 중국을 향한 침략 야욕을 갖고 있다는 한국인의 견해를 충실히 전달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한인 대표단은 한인들 절대다수가 한국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일본 지배로부터의 자유와 국가적 독립을 원하고 있음을 역설했다. 특히 그들은 전 세계를 향하여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약소국 및 강대국 식민지들의 민족자결권을 보장해 달라고 간청했다. 기자는 기사 중간에 “한국 정치학도”와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한국의 정치학도(the Korean political student)는 주장한다. 한국에서 만주의 비옥한 땅으로 도로가 직결되어 있으며 만주에서 중국으로 여러 도로가 이어진다. 여러 사건의 진행 추이를 보면, 일본의 급속한 인구 증가를 감당하기에 한국은 너무나 작아서 일본은 자연스럽게 점점 더 북쪽의 만주로 눈을 돌리고,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중국을 넘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경고하는 종착점이다. 일본은 본성상 자신의 전멸을 막기 위해서 저항이 가장 작은 길을 따라서 국경을 넓혀갈 수밖에 없으며, 그 길은 만주를 통해서 광대한 면적과 무한한 기회를 가진 중국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이 한국의 정치학도”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이승만이다. 때는 만주사변(1931) 발발 12전이었으며, 본격적인 중일전쟁이 개시되기 18년 전이었다. 1919년 이승만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향후 전개될 일본의 팽창주의 침략노선을 정확하게 내다보고 분명하게 예언했다. 동서고금 어느 나라에서든 훌륭한 지도자는 정세를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1919년 40대 중반의 이승만이 동서양 고전을 섭렵하고 당대 최고의 신지식을 아우르는 장시간의 지적 훈련을 거쳐 복잡한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승만을 비롯한 대한인국민회의 대표단 3인은 비록 파리평화회의에 직접 참가할 순 없었지만, 국제사회를 향해 대한 독립의 당위를 적극적으로 설파하여 마침내 당대 미국 최고의 언론사에 2면에 걸쳐 한국 독립을 옹호하는 단독 특집 기사를 싣게 하는 커다란 성과를 냈다. 이로써 일단 미국 언론의 심장부 뉴욕타임스에 코리아의 진지가 구축되었다.
3.1운동을 불과 한 달여 앞둔 상황에서 이승만이 주도하는 미주 교포들의 독립운동 소식은 연해주, 중국, 일본 등지의 해외 한인들을 큰 희망에 부풀게 했다. 특히 파리 강화 회의에 이승만 등 3인의 한인 대표가 참여한다는 뉴스가 일본서 간행되는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에 토막 기사로 실리면서 3.1운동의 직접적 도화선이라 평가되는 도쿄 한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손세일, <<이승만과 김구>>2권, 711-722).
뉴욕타임스, 3.1운동 이후 한국에서 자행된 일제의 만행을 폭로
3.1운동 발발 직후부터 뉴욕타임스는 수개월에 걸쳐서 한국 독립운동을 계속 보도했다. 한반도 전역에서 수백만 명이 전개한 비폭력 시위를 일제가 무력으로 짓밟는 과정에서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베이징, 상하이, 도쿄 등지에서 전송되는 해외전보를 타고 그대로 보도됐다.
1919년 3월 15일 뉴욕타임스는 “절단된 소녀의 손(Girl’s Hands Cut Off)”이라는 기사는 이미 4만 명이나 구속됐다는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보도했다. 시위 현장에서 자행된 인권유린의 사례도 보도됐는데, 일제 경찰이 일본도로 독립선언문을 잡은 어린 소녀의 손을 절단하자 그 소녀가 다른 손을 치켜들었다는 한 사람의 목격담을 실었다. 4월 13일 <<뉴욕타임스>>는 “투쟁, 코리아 전역으로 번져(Fighting Spreads All Over Korea)”에서 일본이 3월 27, 28일 서울에서 비폭력 시위에 나선 시민들을 수천 명이나 잔인하게 학살했다는 한 한인 목사의 주장을 전송된 문자 그대로 소개했다.
7월 13일 같은 신문은 “코리아에서 일본의 만행 혐의(Horrors in Korea Charged to Japan)”란 제목 아래 일제의 인권유린 실상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미국 장로교단의 공식 보고서를 전면 소개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일제는 독립운동 가담 혐의자들을 마구 구속하여 잔악한 방법으로 고문했다. 그 과정에서 남자들 다수가 죽임을 당했으며, 여자들이 알몸으로 모욕을 당하는 사례도 속출했다.
미국인 일본 예찬론자의 “3.1운동” 폄훼
물론 뉴욕타임스가 일방적으로 코리아의 편에 서서 “대한 독립”을 옹호했던 친한파 언론은 아니었다. 1919년 5월 11일 뉴욕타임스는 미국인 일본 예찬론자(an American admirer of Japan)로 알려진 예일대학 철학 명예 교수 래드(George T. Ladd, 1842-1921)의 “한국 봉기의 원인(Causes of the Korean Uprising)”을 게재했다.
래드는 1892년부터 1899년까지 무려 7년간 이토 히로부미(1841-1909) 내각에서 외교 자문관으로 활약했던 대표적인 미국의 친일 인사였다. 같은 기간 그는 일본의 제국대학(帝國大學)에서 강의했는데, 그 당시 그의 교육 개혁 관련 강의는 일본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덕분에 그에겐 메이지(明治) 시대 일본의 비군사 부문 최고 훈장 욱일장(旭日章)이 수여됐다.
1906년 그는 일본 정부의 초대를 받아 시애틀에서 일제 군용 선박을 타고서 50일에 걸친 항해 끝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이때 세 번째로 일본을 방문한 래드는 한국에 주재하던 이토 히로부미의 초대로 한국 방문의 특전을 누렸고, 이듬해 무려 505쪽에 달하는 <<이토 후작과 함께 한국에서(In Korea with Marquis Ito>>를 집필하여 뉴욕에서 출판했다. 미국인의 입을 빌어 일본의 한국 병합과 식민화의 당위를 설파하게 하려는 이토의 간계였던 듯하다. 래드는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기독교계 단체가 주선하는 대중 강연을 했다. 그의 강연에는 많게는 1천5~6백 명, 적게는 수백 명의 청중들이 몰려들었다 한다.
이 책은 분명 1906~7년경 한국의 사회 현실은 물론, 대한제국 조정의 정치 현실을 예리한 시선으로 생생하게 묘사한 중요한 사료임에 틀림이 없지만, 책 곳곳에 한국인의 국민성을 나쁘게 단정하는 대목이 보인다. 그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인종적 우월의식과 문화적 편견이 유감없이 표출돼 있다. 그 밑바탕엔 낙후된 코리아의 자치 능력을 부정하고 일제의 병합을 옹호하는 일제 식민주의의 논리가 깔려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을 떠나기 전 그는 고종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서 이미 중국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세계적 강국으로 부상한 일본과의 무력 충돌을 피해야 한다며 방외인의 충심 어린 충고를 전한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자면, “개인적 이익뿐만 아니라 고종황제와 그의 신민에 대한 실로 현명한 배려에 따른 [고종황제의] 가장 신성한 의무는 일본 정부가 한국에 보호국을 설치하고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The most sacred obligations, not only of self-interest, but also of a truly wise regard for the Emperor and his subjects, bound the Japanese Government to establish and maintain its protectorate over Korea,” 같은 책, 149쪽).”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제국의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Durham Stevens, 1851-1908)가 저격당하고, 이어서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피살된 후 한국인에 대한 래드의 부정적 편견은 최고조에 달했던 듯하다. 일본 문화에 깊은 애정을 품었던 래드는 3.1운동 발발 직후부터 뉴욕타임스가 일본의 가혹한 진압과 인권유린을 비판하는 기사들을 게재하자 심기가 불편했었나 보다. 1919년 5월 11일 같은 신문에 게재된 “한국 봉기의 원인”에서 래드는 한국의 봉기가 비밀결사 조직의 선동에 휘둘린 천도교 극렬분자의 책동이었으며, 기독교 선교사들도 일부 가세했다는 비현실적인 분석을 제시했다. 3.1운동의 의의를 그렇게 왜곡하고 축소하고 폄훼하면서 그는 자치(自治) 능력이 없는 한국인은 이토 히로부미가 제시한 방법에 따라 일본의 통치 아래서 일본 제국에 적극적 동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빠르면 20년 전부터, 늦어도 1906년 이후부터 한국 방문 이후부터 뇌리에 박혀버린 그의 생각이었다.
뉴욕타임스 대논쟁: 이승만 대 래드
불과 나흘 뒤인 5월 18일 뉴욕타임스는 래드의 칼럼에 대한 이승만의 반박문, “한국 대 일본(Korea Against Japan)”을 게재했다. 래드의 칼럼을 읽은 이승만은 격분했음이 분명하지만, 문장 속 그의 어조는 오히려 담담하고 차분하다. “독립운동 관련 래드 교수의 견해에 대한 답변”이란 부제가 붙은 이 글에서 이승만은 래드의 논리적 허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예리하게 파헤치고, 논거를 샅샅이 캐묻는다. 엿새 후인 5월 21일 뉴욕타임스는 정한경의 반박문도 게재했다. 이승만과 정한경의 협공을 받은 래드도 가만있진 않았다. 5월 25일 같은 신문에 래드의 답변, “한국의 봉기(The Korean Revolt)”가 실렸다. 물론 이승만도, 정한경도 조국의 명운이 달린 여론전에서 한 치도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딱 일주일 후인 6월 1일 뉴욕타임스는 “극동 문제들(Far Eastern Questions): 한국 독립운동 관련 일본 입장 비판(Japan’s Position Criticized in Regard to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이라는 제목 아래 이승만과 정한경의 반론을 좌우 양단에 나란히 실었다. 이승만이 반론이 좀 더 길어서 좌단을 다 채우고 우단의 3분의 1쯤까지 갔고, 정한경의 글은 우단 아래쪽 3분의 2를 차지했다.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문장이므로 다음 주 전문을 번역해서 소개하기로 한다. 그 전에 우선 5월 15일 이승만의 반론에서 다음 문단을 읽어두자. 이승만은 스스로 거쳐간 이 모든 과정을 “독립전쟁”이라 불렀다. 이 단락을 읽을 때 머리털이 주뼛 솟는 전율이 느껴졌다. 나만의 과민 증상인가?
“일본인과 그들 선전부대는 자주 지난 시대 한국 정부를 한국적 실정(失政)의 사례로 들먹이면서 일본 현 정권 아래서의 근대적 발전을 자신들의 우월함을 보여주는 실례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시대의 한국을 근대화된 일본과 비교하는 것은 구시대의 일본을 근대화된 한국과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공정하지 못하다. 일본 그 자체를 예로 들어보자. 페리 제독이 처음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의 상황은 당시의 한국보다 정치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비할 바 없이 열악했다. 정치적으로 한국 정부는 온전히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누리고 있었지만, 일본은 수많은 봉건 국가들로 쪼개져서 서로 싸우고 있었다······. 서양 문명을 수용한 이후 일본은 전 국가가 완전히 변화하였다. 한국도 서양 국가들에 문호를 개방한 후에 근대 문명에 보조를 맞춰 필수적인 개혁을 개시해 왔다. 혼자서 나름의 프로그램을 시행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일본인이 일본에서 이룬 바를 한국인도 한국에서 스스로 능히 이룰 수 있었으리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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