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프 몰며 SNS도 열심인 86세 청년, 픽셀 마술사 황규태

2024. 3. 9.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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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친구들
황규태의 ‘말레비치의 제전 Black Square’(2012). [사진 황규태]
1965년 늦가을, 조양상선 소속의 화물선이 부산항을 떠났다. 갑판 위의 청년이 바라본 바다는 너무 넓고 멀어서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청년은 먼바다가 처음이었다. 어디서 왔는지 갈매기 떼가 배를 따라왔다. 니콘카메라를 꺼내어 그걸 찍었다. 스크루에서 나오는 물살도 찍었다.

청년의 이름은 황규태. 얼마 전까지 경향신문의 기자였다. 외국어대를 졸업한 친구가 미국을 가려고 비자를 신청했다. 그를 따라 미국대사관에 가서 자신도 비자를 신청해 보았는데 덜컥 그날 하루 만에 미국행 비자가 나왔다. 몇 달을 기다려야 겨우 나오는 미국 비자였다. 기자 신분이라는 게 먹혔던 모양이다. 그때까지 황규태는 특별히 미국행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미국이 궁금하긴 했다. 비자가 나온 김에 미국에 가기로 했다. 막상 가려니 항공권이 너무 비쌌다. 값싼 화물선을 택했다.

청년은 먼바다를 보며 지나온 날을 떠올렸다. 황규태는 1938년 충남 예산 삽다리에서 태어났다. 집에선 농사를 지었는데 부친은 공무원으로 예산의 여러 면사무소를 전전하고 있었다. 황규태는 조부모와 함께 살았다. 읍내의 예산농고에 진학하면서 사진반 활동을 했다. 이때 자신의 카메라를 처음으로 구입했다. 그리 비싸지 않은 일제 카메라였다.

당시는 국내 대학에 사진학과가 없었다. 황규태는 미대로 진학하고 싶었다. 예산에서는 미대 입시에 필수인 석고상 데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었다. 입시 과목으로 뭐가 있는지도 몰랐던 황규태는 석고상을 보지도 목탄을 만져 보지도 못한 채 무작정 서울미대에 응시했다. 결과는 당연히 낙방. 2차인 동국대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과와 전공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사진에만 몰두했다.

한 학기 등록금으로 중고 카메라 구입

1963년 현대사진연구회 멤버들. 앞줄 왼쪽에서 둘째 카메라를 들고 앉아있는 사람이 황규태 작가. [사진 황규태]
돈암동에서 하숙을 했다. 그때는 사진가라면 현상, 인화 등의 작업을 손수 해야 했다. 하숙집 화장실에 암실을 차려 흑백사진용의 현상, 확대 인화 장비를 갖추었다. 미군 부대에서 나온 100피트짜리 필름을 잘라서 빈 필름 통에 감아 넣어서 썼다. 한 학기 등록금으로 중고 라이카 카메라를 구입했다. 신품 라이카는 집 한 채 값이었다. 비록 중고이긴 해도 명품의 포스가 대단했다. 카메라를 산 덕으로 한 학기를 휴학해야만 했다. 물론 부모에겐 비밀이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사진 잡지를 구해다가 공부를 했다. 이때 미국의 사진 잡지 ‘파퓰러 포토그라피’에서 만 레이(1890~1976)를 통해 포토 몽타쥬라는 신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학생 황규태는 1962년 이형록(1917~2011) 등이 주도한 현대사진연구회에 박영숙 등과 함께 창설 멤버로 참여했다. 1963년 대학을 졸업하던 해, 경향신문에 견습기자 6기로 입사했다. 입사 동기로 나중에 독문학자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김주연이 있었다.

3년간의 기자 생활이 어제 같은데 지금은 화물선 수부(水夫)를 닮은 모습이다. 첫 기항지는 대만이었다. 한국에서는 일부 부잣집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귀한 파인애플이 대만에서는 헐값이었다. 호기롭게 한 궤짝 샀다. 배에 올라 파인애플만 먹어대니 나중에는 신물이 났다. 그 귀한 걸 바다 위에 던져 버렸다. 지금도 파인애플은 안 먹는다. 다음 기항지는 일본의 요코하마. 지척의 동경에 가서 이틀 밤을 잤다.

부산을 떠난지 40일, 화물선은 드디어 최종목적지인 미국 서부해안 샌디에이고에 도착했다. 40일 동안 뱃멀미를 해대었더니 허리가 28인치로 확 줄어들었다. 말라깽이가 된 황규태는 LA로 갔다. 서울의 하숙집 주인이 어느새 LA로 이민 와서 터를 잡고 있었다. 당시는 외화 소지가 1인당 100달러로 제한되었다. 무일푼의 황규태는 그 집에서 신세를 지고 살면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여행 중에 찍었던 갈매기와 물결 사진을 LA의 한 신문사에 보내니 게재해 주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현지의 사진가로 데뷔를 한 셈이 되었다. 마침 현상소에 일자리가 났다. 거기서 프린터로 7~8년을 일했다. 컬러 현상이란 걸 처음 하게 되었다. 코닥 회사에서 현상소로 무한대로 재료가 공급되었다. 필름으로 장난을 쳐도 좋았다. 장난처럼 필름 태우기, 포토몽타주 등의 작업을 했다.

황규태 작가
이 무렵 이화여대에서 국제교류 명목으로 학생들이 미국으로 왔었는데 황규태는 그들 중 한 여학생을 알게 되었다. 대학 3년생이었던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황규태와 결혼하여 LA에 정착했다. 황규태는 독립하여 현상소를 차렸다. 부인이 운영을 맡고 황규태는 현상 등 기술적인 실무를 맡았다. 돈을 제법 벌었다.

이중노출, 몽타주, 콜라주 등의 실험적인 작업으로 신문회관에서 개인전을 열기 위해 1973년 잠시 서울을 방문했다. 1974년, 대학생 때 구해다 보던 사진잡지 ‘파퓰러 포토그라피’에 황규태의 포토몽타주 등을 소개하는 특집이 7페이지 분량으로 실렸다. 만 레이의 사진 세계를 이 잡지에서 처음 알게 된 게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변방의 잡지 구독자에 불과했던 황규태가 미국 현지에서 그 잡지의 특집기사 사진가로 실린다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 1975년에는 사진잡지 ‘35밀리 카메라’의 표지작가가 되었다. 황규태는 승승장구했다.

LA에서 사귄 친구로 서울미대 출신 화가 김봉태(1937~)가 있다. 부산 출신의 김봉태는 대인관계가 좋았다. 김봉태를 통해서 화가 윤명로(1936~)를 알게 되었다. 사진가 강운구(1941~)도 그가 미국을 방문하는 바람에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2001년 황규태의 개인전이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렸다.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바 있는 윤명로의 주선으로 황규태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사진 강의를 맡았다. 아무 준비도 없이 엉터리로 친 시험이긴 했으나 서울대 미대에 낙방한 경험이 있는 황규태로서는 서울대 미대 대학원생들에게 사진학을 가르치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황규태 하면 픽셀 작가로 유명하다. 픽셀은 픽쳐 엘리멘트의 준말로 우리말로는 화소(畫素)라 한다. 그림에 비유하자면 모든 사진은 픽셀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점묘화다. 필름의 픽셀 하나는 그 크기가 매우 작아서 점묘화의 점 하나처럼 맨눈으로 지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진을 극단적으로 확대하면 보이지 않던 픽셀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픽셀 하나가 카메라로서는 지각의 최소단위다. 그걸 넘어서면 인식의 단계가 된다. 그러니까 픽셀은 지각과 인식의 분기점이 되는 셈이다.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으로 러시아 절대주의 화가 말레비치(1879~ 1932)가 있다. 색채를 회화의 부속물이 아닌 독립적인 존재로 보았고 이를 통해 대상으로의 지각을 초월한 인식의 정신세계를 표현했다. 여기서 색채를 픽셀로 바꾸면 황규태의 사진 세계가 된다.

메모광이지만 오늘에 집중하는 사진가

1990년대에 한국으로 돌아온 오랫동안 초망원렌즈로 한강을 소재로 한 작업을 했다. 렌즈가 크면 무게를 지탱하는 트라이포트도 커야 한다. 무거운 장비를 들고 움직이는 게 힘들었다. 먼 거리의 대상들을 극단적으로 확대하여 카메라로 당기니 한강의 물결과 사람의 모습이 하나의 평면으로 겹쳐지고 뭉쳐져, 단일한 레이어 위에 놓인 픽셀들의 집합으로 잡혔다. 사물들을 픽셀의 평면적인 집합과 질서로 배치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지금은 컴퓨터에서 픽셀 작업을 한다. 생명체를 환원하면 DNA로 집약되는 것처럼 황규태는 모든 현상적인 존재를 픽셀로 환원하여 이를 다시 재구성하여 확산하고 있는 중이다.

황규태는 메모광이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스크랩도 하고 그 옆에 아이디어를 써넣기도 한 작업노트가 상당한 분량이다. 그런데 정작 황규태는 오늘만을 살아가는, 기억이 불필요한 사람이다. 갑작스레 미국행을 결행했듯이 내일 갑자기 무얼 할지도 모른다. 죽고 나서 자신을 위한 미술관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지프차를 몰면서 페이스북도 열심히 하는 86세의 청년, 하루하루 픽셀로 환원하고 형태로 확산하는 일일시호(日日是好)의 사진가, 황규태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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