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상의 정치성·상술, 올핸 ‘오펜하이머’ 택하나

2024. 3. 9.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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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전지적 시네마 시점
모든 건 다 ‘기생충’ 탓(덕)이다. 2020년 미국의 제92회 아카데미상(오스카상) 시상식에서 이 영화가 무려 4개 부문, 그것도 원래는 웬만해서 같이 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작품상과 감독상 모두를 비롯해 각본상과 국제장편영화상까지 수상하고부터 모든 것이 다 뒤집혔다.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AMPAS :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는 ‘기생충’에게 4개의 오스카상을 파격적으로 몰아 준 후 마치 예수가 그랬듯이 ‘이제 다 이루었도다’의 표정을 지었다.

‘가여운 것들’ 엠마 스톤 여우주연상 전망

올해 아카데미에서 각본상·편집상·감독상·작품상 등의 후보에 오른 쥐스틴 트리에 감독 ‘추락의 해부’. [사진 각 영화사]
아카데미는 수십 년에 걸쳐 변화와 개혁을 한 걸음 한 걸음씩 진전시켜 왔다. 초창기의 변화는 시드니 포이티어 같은 흑인 배우에게 남우 주연상을 시상하면서 시작됐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마음은 태양’이란 영화로, 사실 주제곡으로 쓰인 팝송 ‘투 써 위드 러브, To Sir with love’로 더 유명한 배우 시드니 포이티어는 1964년 ‘들백합’이란 영화로 남우주연상을 탔다. 1964년이라면 미국 최초로 ‘연방 민권법’이 막 제정됐을 때이다. 민권법은 일종의 흑인 시민권이다. 흑인들이 드디어 참정권을 인정받았고, 그 해 아카데미는 그런 정치사회적 변혁을 반영시켰다.

이후 아카데미는 여성들에게, 성 소수자들에게, 외국인들에게도 차례로 문호를 개방시켰다. 무엇보다 진정으로 마음을 열었다. 2002년 흑인 여배우 할리 베리가 영화 ‘몬스터 볼’로 여우주연상을 탄 것은 흑인 인종차별 문제와 여성 차별 문제를 한번에 돌파한 셈이 됐다.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것은 사실상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닌데, 인정하고 존중하는 척 사실은 ‘외국어영화상’이란 이름으로 차단막을 쳤던 유럽 영화들에 대해 국제장편영화상이란 이름으로 공식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 2020년이다. 여기에 지역의 장벽을 해체시킬 마지막 관문이 남았던 바, 바로 아시아 영화들을 끌어 들이는 것이다. 그런 등등의 요소에 아주 정확하게 들어맞는 인물과 영화가 한편 있었으니 봉준호와 ‘기생충’이었다.

마침 봉준호가 미국의 한 영화 웹진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그는 오스카상에 대해 “미국 아카데미는 국제영화제가 아니다. 로컬 상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아카데미가 늘 가장 아프게 생각하는 부분이었으며 마침 미국 할리우드는 전략적인 의미에서 아시아 시장을 확대할 강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던 시기였다. 특히 한국 시장은, 6억5000의 아세안 10개국을 비롯해 각각 14억 인구 규모의 인도와 중국 시장으로 가는 길목에 놓여 있는 중요한 교두보였다. 할리우드로서는 스스로가 몸을 낮추지 않을 수 없는 시장 환경이 조성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기생충’과 같은 맞춤형 작품, 그것도 걸작이 나왔다.

아카데미는 그렇게 스스로 장벽을 무너뜨렸다. 당시는 미국이 뉴멕시코 지역에 불법 이민자를 막겠다며 장벽을 쌓을 때였다. 동시에 (미국 부호 유태인들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고립시킬 때였다. 당시 대통령 트럼프가 정치와 외교를 고립의 길로 가져 가려 할 때 미국의 문화예술가들은 그 장벽을 베를린 장벽처럼 무너뜨려야 한다는 정치적 욕망을 작동시켰다. 아카데미상은 이렇게 오만 가지 사회적 정치적 현상이 둘러 싸여 있다.

10개 부문 수상이 예상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 촬영 현장. [사진 각 영화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충’의 4개 부문 석권은 향후의 수상 예측을 온통 혼돈과 미스터리의 소용돌이로 몰아 넣었다. 2020년의 분위기 대로라면 올해 제 96회 오스카상의 주역은 프랑스 영화 ‘추락의 해부’와 이 작품을 만든 쥐스틴 트리에 감독이 돼야 한다. ‘추락의 해부’는 ‘기생충’과 흡사한 경로를 밟고 있는데 일단 지난해 5월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그리고 현재 아카데미에서는 각본상과 편집상·감독상·작품상 등에 올라 있다. ‘기생충’이 가져 간 주요 4개 부문 중 하나가 다른데 ‘기생충’은 국제장편영화상을 받았고 ‘추락의 해부’는 대신 주연을 맡은 산드라 휠러가 여우주연상에 올라 있다. 그렇다고 ‘추락의 해부’가 다시 한번 ‘기생충’같은 파격의 행보를 걸을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못할 것 같다.

‘추락의 해부’는 각본상 수상 정도가 유력해 보인다. 셀린 송이 만든 ‘패스트 라이브즈’와 경합을 벌여야 하지만 작품의 규모와 사회적 이슈를 생각할 때 ‘추락의 해부’가 더 우세해 보인다. ‘패스트 라이브즈’의 셀린 송은 1997년에 나온 한국영화 ‘넘버3’ 감독 송능한의 딸이어서 국내 영화인들의 지대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중이긴 하다. 두 작품 모두 뛰어난 영화다. 다만 각본의 깊이 면에서 ‘추락의 해부’가 한 수 위로 보인다.

‘추락의 해부’의 산드라 휠러가 여우주연상에서 유력해 보였던 바로 그 순간 그리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가여운 것들’의 엠마 스톤이 나와 버렸다. ‘추락의 해부’가 자꾸 수상권에서 멀어져 보이는 것은 치열한 경합 작품들이 후반 들어 급격하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가여운 것들’은 한 마디로 ‘섹스 오딧세이’ 같은 작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여배우가 혼신과 투혼의 연기를 펼쳤다는 것을 의미하며 아카데미 투표단은 엠마 스톤으로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작품상과 감독상 면에서도 ‘추락의 해부’는 두 개의 거산(巨山)을 넘어야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와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의 ‘플라워 킬링 문’이 그것이다. 아마 넘기 힘들 것이다.

셀린 송 ‘패스트…’ 후보에 만족할 수도

각본상과 작품상 후보에 오른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 [사진 각 영화사]
한국 시간으로 11일 오전 8시(현지 10일 저녁 7시) LA 돌비극장에서 시작될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두 가지 방향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가 총 23개 부문 중 약 10개 부문을 싹쓸이하되(작품·남우주연·남우조연·각색·촬영·편집·음향·분장·미술), 감독상을 ‘플라워 킬링 문’의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에게 돌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플라워 킬링 문’의 배우들은 개인상에서도 매우 경쟁력이 높다. 남우주연상 후보인 로버트 드 니로도 그렇고 여우주연상 후보인 릴리 글래드스톤도 그렇다. 로버트 드 니로는 안타깝게도 ‘오펜하이머’의 킬리언 머피에게 밀릴 것이다. 릴리 글래드스톤은 인디언 원주민 출신 배우라는 점에서 인상깊지만 엠마 스톤의 벽을 못 뚫을 가능성이 높다.
제96회 아카데미상 주요 부문 후보
정리하자면 이번 아카데미는 전통과 변화, 관습과 변칙을 병행할 것이다. 이날의 시상식은 한 마디로 ‘오펜하이머’의 시간이 될 것이다. 거기에 거장 마틴 스콜세이지에 대해 배려를 할 것이다. 그가 이번에 감독상을 타면 2007년 ‘디파티드’에 이어 두번 째가 된다. 마틴 스콜세이지는 1942년생으로 올해 82세이다. 그리스 감독 ‘가여운 것들’을 만든 요르고스 란티모스에게는 여우주연상으로 고려해 줄 것이며, ‘추락의 해부’를 만든 쥐스킨 트리에에게는 각본상을 돌릴 가능성이 높다. 물론 아카데미가 파격적인 흥행을 노린다면 ‘추락의 해부’에 작품상과 감독상을 시상할테지만, 그건 이 영화가 ‘오펜하이머’와 ‘플라워 킬링 문’을 제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전례는 ‘기생충’이 엄청난 대작이었던 ‘1917’과 ‘조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같은 문제작을 다 앞선 것과 같은 맥락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까지는 못할 것이다. ‘추락의 해부’가 ‘기생충’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가 후보에 오른 것 정도로 만족해야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점이다. 훌륭한 작품이고 특히 오프닝 씬이 뛰어 나지만 이번 아카데미상은 한국 작품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신예급이었던 중국의 클로이 자이가 2021년 ‘노매드 랜드’로 작품상을 탄 것을 고려하면 작품상 수상이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안될 것이다. 아카데미상은 매우 정치성이 높고 높은 지략의 상술이 동원되는 상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경제국제적 상황은 미국 아카데미의 고려 사항이 아니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11@naver.com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 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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