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사라지는 것과 다가오는 것

2024. 3. 9.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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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로, 전북 고창, 1976년 ⓒ김녕만
닭을 팔러 시장에 갔다가 팔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일까, 아니면 시장에서 닭 한 마리 사 오는 길일까? 사연은 알 수 없어도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난리를 쳐야 할 사나운 수탉이 아주머니의 손아귀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얌전한 것을 보면 이 아주머니는 닭의 급소를 아는 게 틀림없다. 물렁물렁한 장바구니를 용케 각 잡아 머리에 이고 성질 고약한 수탉 한 마리를 한 손으로 제압한 채 저 멀리 언덕 너머 마을까지 걸어가고 있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은 흔들림 없이 단단하다.

때마침 자동차 한 대가 건조한 봄날에 메마른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다. 달구지 다니던 길이 신작로로 넓혀지면서 가로수가 몇 그루만 듬성듬성 살아남았다. 수백 년을 이어 온 우리의 전통적인 농경문화가 서서히 사라지고 새롭게 산업사회가 등장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머리에 짐을 이고 커다란 수탉 한 마리쯤은 가볍게 움켜쥔 채 거뜬하게 걸어가는 당찬 아주머니도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는 새 시대를 막을 수는 없으니 그 뒷모습이 괜스레 애틋하고 아련하다.

산업사회는 속도와 능률이 미덕이다. 뒤돌아볼 겨를 없이 더 빨리 달리기 위해서 울퉁불퉁한 신작로는 머지않아 매끄럽게 포장될 것이고, 구부러진 길은 직선거리 지름길로 펴질 것이다. 다가오는 새 물결을 거부할 방법은 없다. 결국엔 이렇게 새로운 문물이 일으키는 흙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쓰며 구시대는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말 운명이다. 지난 50년의 초고속 변화가 우리의 추억마저 빠르게 지웠다 해도 가끔은 그 시절이 그립다. 지금이라도 사진 속 저 길을 따라 언덕을 넘어가면 시간이 멈춘 고향 마을이 나타나고 그 시절의 나와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너무 멀리 왔음을 또한 안다. 저 수탉처럼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세월의 손아귀에 붙들려 여기까지 왔다. 그래도 문득문득 추억에 잠겨 떠올릴 고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김녕만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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