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층 상승 사다리 대신 또 다른 ‘천장’

2024. 3. 9.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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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천장
계급 천장
샘 프리드먼
대니얼 로리슨 지음
홍지영 옮김
사계절

영국의 방송사인 6TV 직원 3명 중 2명꼴인 67%가 전문직·경영직 등 이른바 ‘특권층’ 출신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외주제작국의 경우 5명 중 4명꼴인 79%가 특권층 출신이었다. 외주제작국 안에서도 고위직만 놓고 보면 10명 중 9명인 90%가 특권층 출신이고 노동 계급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여기서 보이는 것처럼 영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건 특권층 출신이 엘리트 직종 취업, 임금, 승진 등에서 유리할 거라는 짐작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력과 재능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는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 마이클 샌델(『공정하다는 착각』)의 말처럼 ‘계층 이동 사다리’ ‘사회적 이동성’ ‘아메리칸드림’에 고장이 났다는 지적은 그렇지 않아도 최근 자주 등장하고 있던 터였다.

저자들은 계급 천장 현상을 분석하며 이를 부수는 방법들도 제안한다. [GettyImagesBank]
『계급 천장』의 지은이 샘 프리드먼과 대니얼 로리슨은 빅데이터에 기반해 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계급 간 불평등 해소책을 제시했다. 지은이들은 영국 최대 고용조사인 노동력조사(LFS)를 통해 확보한 10만8000명의 개인과 1만8000명 이상의 상위 직종 종사자들의 계급 배경 데이터를 활용했다. 여기에다 방송·회계·건축·연기 4개 분야 직업에 걸친 175건의 심층 인터뷰로 현장성을 보충했다. 책 제목 ‘계급 천장’은 ‘유리 천장(성별이나 인종 때문에 능력과 기술을 갖추고 있어도 성공을 제약하는 보이지 않는 천장)’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출신 계급 때문에 갖게 되는 불리함을 뜻하는 용어다.

프리드먼과 로리슨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가장 선호되고, 힘 있고, 화려하고, 영향력 있는 직업에 특권층이 불균형적으로 많이 진출하고 있으며 노동 계급 출신은 너무 자주 소외되거나 배제된다. 특권층 출신이 노동 계급 출신보다 의료·법률·금융·회계·건축·방송 등 엘리트 직종에 종사할 확률은 약 6.5배 높았다. 특권층 출신이 의사가 될 확률은 노동 계급 출신에 비해 12배 높은 반면 엔지니어가 될 확률은 2배가량에 불과했다. 부모가 의사인 사람은 부모가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보다 의사가 될 확률이 무려 24배나 높다.

계급에 따라 임금 격차도 컸다. 엘리트 직종에 종사하는 노동 계급 출신은 같은 일을 하는 특권층 출신 동료보다 평균 16% 더 적게 번다. 격차가 가장 큰 금융과 법률 분야의 경우 연평균 우리 돈 3000만원 정도 차이가 난다. 여기에 여성, 장애인, 인종-민족적 소수자 등 다른 불평등의 축이 더해지면 이중, 삼중의 불이익에 직면하게 된다.

특권이 능력으로 오인되는 경로는 다양하다. 방송이나 연기처럼 불안정한 단기 계약과 저임금을 견뎌야 하는 직종에서는 ‘엄마아빠은행’이라 불리는 부모의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최후의 성공을 보장받기 어렵다. 동종선호라 불리는 ‘초록은 동색’ 현상은 영국 사회에서도 강하게 나타났다. 문화적으로 유사성을 갖고 서로 ‘말이 통하는’ 같은 계급 출신에게 후한 점수를 줘 인재발굴이나 승진에 유리한 후원을 공공연하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적합성도 특권층 출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대화하는 방식, 옷차림, 스타일 등이 상급자들에게 적합한 사람이 다른 계급 출신보다 선택을 더 잘 받는 경우가 많았다.

『계급 천장』은 선진국인 영국에 아직도 살아 있는 현대판 카스트제도의 실상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이 책의 지은이들은 계급 천장 현상 분석에만 그치지 않고 ‘계급 천장을 부수는 10가지 방법’을 책 말미에 제안했다. 한국 또한 영국 사회와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계층 천장’에 대한 연구와 불평등 타파를 위한 아이디어에 여러 가지 힌트를 줄 수 있다.

한경환 자유기고가 khhan88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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