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우리의 집에도 벌이

2024. 3. 8.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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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이 찾아오자 ‘별거’하는 가족
벌에 쏘이자 ‘결합’을 시도한다

앤드루 포터 ‘벌’(‘사라지는 것들’에 수록, 민은영 옮김, 문학동네)

한 달 전부터 가장 열심히, 매일이다시피 하는 일은 책 버리기이다. 책으로 높이 쌓인 작업실 복도를 똑바로 못 걷고 옆으로 조심조심 지나다니는데 어느 날 양쪽에서 책이 무너지듯 쏟아져버렸다. 이러다 책 속에 파묻혀 혼자 큰 사고를 당할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너무 많이 갖고 있다는 데에서 불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대량으로 책을 처분할 방법을 찾다가 포기하고 언젠가 구(區)에서 나눠줘 아끼고 있던 재활용 투명 전용 봉투에 스무 권씩, 한 손에 들고 옮기기 적당할 만큼만 매일 버리기 시작했다. 버리는 책이지만 폐지를 수거해가는 분이나 누군가 가져가서 다시 쓰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포장하듯 묶어 제목이 보이도록. 하루에 두세 묶음쯤 버리는데 신기하게도 버린 지 십 분도 안 되어 사라진다. 책을 버리면서 또 날마다 신간을 주문한다. 가능하면 영원히 갖고 있을 만한 책으로.
조경란 소설가
‘벌’은 이런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4월 말에 찾아왔다.” 제목이 ‘벌’이니 이렇게 읽힌다. ‘벌들은 4월 말에 우리 집에 찾아왔다.’ 집에는 원하는 것이 드물게 찾아오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높은 비율로 원치 않는 것들이 찾아오기도 하지 않나. 집엔 가족이 있으니 찾아온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고 독자인 나는 문득 생각하면서도 자신 있게 문장화할 수는 없다. ‘가족’의 일이기 때문에. 화자인 나는 아내 뜻에 따라 전문 양봉가를 불러서 벌을 인도적인 방식으로 제거한다. 그건 일시적인 방법이었고 양봉가는 벌집이 있던 옥외 세탁실 벽 내부를 이른 시일 안에 완전히 밀봉하지 않으면 다른 벌떼가 올 거라고 조언했다. 나는 지금 그럴 만한 금전적인 여력이 없다. 다섯 살인 딸 리아를 어린이집에 보내야 하고 집 대출금과 생활비도 부담스럽다. 게다가 얼마 전에 아내가 아파트를 구했다. 아내는 말했다. 자신에게는 ‘어두운 곳’이 있어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지금은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시기라고.

나는 아내를 잘 알고 이해한다. 그런 아내를 압박하면 아내를 잃을 거라는 사실도. 그러나 이런 ‘시험적 별거’는 나와 딸에게는 좋지 않은 시간이다. 딸은 동요하고 자신의 가정이 몹시 취약한 상태에 놓였다는 걸 아는 나는 벌집처럼 무거운 두려움이 자신을 흔들고 있다고 느낀다. 밀봉하지 않은 세탁실 벽과 아래쪽에 난 작은 구멍으로 이제 벌이 떼를 지어 드나든다. “작은 구멍, 떼를 지어 드나드는 벌들.” 나는 결국 벌에 쏘이고 딸을 차에 태워 아내가 머무는 아파트 앞으로 간다. 아내가 나올까. 이들은 서로의 어두운 곳에 대해, 원치 않는 것이 드나드는 작은 구멍에 관해 이야기하게 될 수 있을까.

아내를 기다리던 그날 저녁에 나는 가족실에서 딸을 감싸 안고 앉아 유리문 너머를 바라본다. 바깥은 어두워지고 그 속에서 진입로까지 윙윙거리며 몰려와 부녀를 두렵게 만들었던 벌들을 분간하기란 어렵다. 나를 취약하게 만들고 아내를, 가정을 취약하게 만드는 어떤 것. 세탁실 벽 주위를 느린 동작으로 선회하며 숫자를 점점 불려나가고 있을 그들. 그들을 사라지게 할 방법에 대해 가족은 이야기해야 한다. 단지 어디인지 알기가 어려울 뿐이지만 저 멀리 어딘가에 벌들이 있으니까. 밀쳐두고 외면하고 지연시키고 회피하고 덮어버릴 게 아니라. 나는 딸을 더 가까이 끌어당겨 안으며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책을 덮고 밖으로 나가 좀 걸었다. 벌이라는 상징의 쓰임과 작은 문제로도 크게 흔들려 버리곤 하는 가족 소설에 대해 더 생각해보려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 집 골목에서 한 남자가 한 번도 열린 걸 본 적이 없는 그 집 담 옆 셔터를 살짝 들어올리곤 허리 숙여 들어가는 걸 보았다. 그리고 난 한눈에 알아보고 말았다. 순간처럼 열렸다 닫혀버린 그 셔터 안쪽에 쌓이고 또 쌓여 있는 내가 버린 책 묶음들을. 내 이웃은 그 책들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다시 작업실로 돌아와 나는 ‘벌’이 수록된 앤드루 포터의 소설집을 영원히 갖고 있을 책들을 모아둔 책장에 단단히 꽂아두었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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