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다 알려주는데… 태아 성감별금지법 위헌 논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유빈 2024. 3. 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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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관 6대 3으로 ‘성별 고지 금지’ 위헌 결정
헌재 “태아 생명 보호 수단으로 부적합”
“고지 제한 시기를 앞당기도록 개선 입법부터” 주장도
지난주 헌법재판소가 태아 성별을 32주 전에는 공개하지 못하게 하는 의료법 제20조 제2항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헌재 결정으로 이제 의료진에게 언제든 태아 성별을 물어보면 알 수 있게 됐다. 사실상 사문화된 법이라는 입장이 많았으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관련법이 입법 공백 상태에서 태아 생명권 보호를 강화할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헌재는 지난달 28일 의료법 제20조 제2항에 대한 헌법소원심판 사건에서 재판관 6(위헌)대 3(헌법불합치) 의견으로 위헌을 결정했다. 의료법 제20조 제2항은 의료인은 임신 32주 이전에 태어나 임부를 진찰하거나 검사하면서 알게 된 태아의 성을 임부나 임부의 가족, 그 밖의 다른 사람이 알게 해선 안 된다고 규정해 성별 고지를 금지하고 있다. 청구인들(변호사들)은 이 조항이 헌법 제10조로 보호되는 부모의 태아 성별 정보 접근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하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이미 이 조항은 2008년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마련된 대체 법안이다. 남아선호사상으로 성비불균형이 심해지자 1987년 제정된 태아 성감별금지법은 임신 기간 내내 성별 고지를 금지했다. 해당 법이 2008년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뒤 이듬해인 2009년 임신 32주 이후로 고지할 수 있도록 했는데 최근에는 이조차 부모의 알 권리를 침해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종석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지난 2월 28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자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 자연성비” “성별 알기 전 중절”

헌재는 “개정된 이후 15년이 지난 현재 우리나라는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과 함께 양성평등 의식이 상당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등 사회적 변화를 고려할 때, 임신 32주 이전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는 행위를 태아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것으로 보고 태아의 생명을 박탈하는 낙태 행위의 전 단계로 취급해 이를 제한하는 것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출산 순위와 상관없이 출생성비가 모두 자연성비에 도달한 것은 국민의 가치관과 의식 변화에 기인한 것이므로 해당 조항은 태아의 생명보호를 위한 수단으로써 실효성이 없고 그 존치의 정당성에 의문이 제기된다고 할 것”이라고 했다.

변화한 사회상과 함께 부모의 알 권리도 강조했다. 헌재는 “부모가 태아의 성별을 알고자 하는 것은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욕구로 태아의 성별을 비롯해 태아의 모든 정보에 접근을 방해받지 않을 권리는 부모로서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라며 “태아의 생명보호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효과적이거나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입법 수단으로서 현저하게 불합리하고 불공정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성별을 이유로 한 낙태가 있을 수 있다는 아주 예외적인 사정만으로 모든 부모에게 임신 32주 이전에는 태아의 성별 정보를 알 수 없게 하고 있다”며 “태아 성별을 이유로 낙태 방지라는 입법 목적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낙태로 나아갈 의도가 없는 부모까지도 규제하고 있는 과도한 입법이므로 필요 최소한도를 넘어 부모의 기본권을 제한한다고 할 것”이라고 밝혔다.

헌재의 위헌 결정에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다음날 입장문을 통해 “부모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규정으로 실효성이 없어 태아 성감별 금지법은 폐지돼야 한다”며 헌재 결정을 반겼다. 2016년 이후부터 임신 32주 이전 태아 성감별 시 의사는 면허 자격 정지 1년과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있다.

산부인과의사회는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으로 인한 남아선호사상의 감소로 인해 2010년대 중반부터는 출산 순위와 관계없이 자녀의 성별에 대한 인위적 개입이 거의 없어졌다”며 “2010년대 초반까지는 셋째 아이 이후 자녀를 낳는 동기를 보면 남아 출산이 주요했다고 추정되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는 출산 순위에 관계없이 자녀의 성별에 대한 인위적 개입이 거의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서울 한 병원 신생아실. 연합뉴스
또 “일반적으로 초음파를 이용한 태아 성감별이 가능한 최소 임신 주수는 16주인데, 적어도 (인공적인 임신 중절의) 97.7%는 태아 성별을 모른 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8년 발표한 ‘인공 임신 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누적 비율로 봤을 때 임신 주수가 4주 이하일 때 31.5%, 8주 이하 84.0%, 12주 이하 95.3%, 16주 이하 97.7%로, 태아 성별을 제대로 알 수 있기 전에 임신 중절이 이뤄졌다.

의사회는 “부모가 먼저 의료인에게 태아의 성별을 확인·고지해 줄 것을 요구하고 의료인이 이에 응하는 경우가 대부분임에도 태아 성감별 금지법 위반은 의료인에게만 적용된다”며 “의료인만 처벌하는 것은 기존의 낙태죄와 비교하더라도 형평성에 어긋난다”고도 주장했다.

◆소수의견 “일거 폐지는 타당하지 않아”

6명 헌재 재판관 외에 이종석 헌재소장과 이은애, 김형두 재판관은 헌법불합치 의견을 냈다. 아예 폐지하기보다 현행 성별 고지 제한 기간인 32주를 앞당기도록 개선 입법하고 폐지는 잠정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봤다. 이들 역시 “과거와 같이 태아의 성별고지를 엄격하게 규제할 필요성이 낮아진 상황에서 통상 임신 기간을 40주로 볼 때 모자보건법 시행령에서 인공 임신 중절의 허용 한계로 규제하는 임신주수를 훨씬 초과해 태아의 성별고지를 금지하는 심판대상조항은 기간 면에서 지나친 제한”이라며 “부모에게 성별을 알려야 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음에도 심판대상조항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과잉금지원칙을 위반이라 지적했다.
사진=연합뉴스
다만 “태아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국가는 태아 생명을 보호할 중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며 “우리 사회에서 성별을 이유로 한 낙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으므로 비록 과거보다 그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하더라도 국가는 이러한 낙태로부터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책임을 소홀히 해선 안 되고 태아의 성별 고지를 제한할 필요성은 계속 존재한다고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단순 위헌 결정을 하는 것은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한 수단을 대안 없이 일거에 폐지하는 결과가 되므로 타당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들 재판관은 “잠정적으로 적용하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고 입법자로 하여금 낙태죄에 관한 형법 개정안 등 여러 사정을 고려해 태아의 성별 고지 제한 시기를 앞당기는 것으로 개선 입법을 하도록 함으로써 태아의 부모에 대한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하면서도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한 수단에 관해 법적 공백이 없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입장을 냈다.

헌재는 2019년 형법상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더 이상 낙태죄는 법적 효력이 없지만 국회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대체 입법을 하지 않았다. 이런 탓에 낙태가 법적으로 죄는 아니지만, 안전하게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제도 마련이나 정부 차원에서의 정보 제공도 전무하다. 헌재는 2020년 12월31일까지 대체 법안을 마련하라고 했었지만 낙태와 관련해 발의된 19개 법안 모두 국회에 계류 중이다.

박유빈 기자 yb@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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