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출국’처럼 떠나는 이종섭 호주대사···법무부·공수처의 ‘주거니 받거니’식 출금 해제
통상 이의신청 90% 기각…이종섭에 이례적 허용
해병대 채모 상병 사망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의 핵심 인물인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주호주 대사로 임명되고 출국금지가 해제되기까지 모든 절차는 나흘 만에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출국금지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 때로부터는 불과 이틀 만에 이 전 장관의 출국길이 열렸다.
대통령실이 출국금지 상태에 있는 이 전 장관을 대사로 임명한 직후 외교부는 외교관 여권을 발행해 줬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4시간짜리 약식조사로 출국금지 해제를 위한 명분을 만들어줬고, 법무부는 신속하게 출국금지 해제 결정을 해줬다. 여러 기관이 마치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움직인 것이다.
이 전 장관이 대사직 수행을 위해 호주로 출국한 뒤에도 이번 ‘속전속결’ 출국금지 해제는 또 다른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과 대통령실이 개입 의혹을 받는 수사의 핵심 피의자를 해외에 거주하는 공직에 임명한 것 자체가 논란의 소지가 큰데다 대사 근무지 부임을 위해 필요한 조치 또한 군사작전처럼 이뤄졌기 때문이다. 야당과 시민단체에서는 ‘범인 도피’ ‘수사 방해’라는 표현을 써가며 비판한다.
법무부는 8일 출국금지 심의위원회를 연 뒤 이 전 장관에 대한 출국금지를 해제했다. 법무부는 이 전 장관의 출국금지가 공수처의 별다른 조사가 없는 상태에서 여러 번 연장됐고, 전날 공수처에서 출석조사가 이뤄진 점을 고려해 이 전 장관의 이의신청이 이유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이 수사 절차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한 점도 고려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이 전 장관을 주호주대사로 임명한 것은 지난 4일이다. 이 전 장관은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이 채 상병 사망 사건을 수사한 뒤 임성근 해병대 1사단 단장 등 8명에게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해 경찰에 이첩한 것을 부당하게 회수·재검토한 혐의 등으로 고발돼 공수처가 수사 중인 상황이었다.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이 수사에 외압을 행사했는지 규명하는 데 핵심 고리인 이 전 장관을 대사로 임명하자 ‘수사 회피를 위한 도피성 인사’라는 비판이 거셌다.
수사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자 공수처 관계자는 지난 5일 “아무리 고발됐더라도 국가를 대표해 공무로 정식 발령이 나서 간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그 무렵 공수처가 이 전 장관에게 수사 협조 문서를 받고 출국금지를 해제해주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 전 장관은 법무부에 출국금지를 풀어달라고 이의신청을 낸 것도 지난 5일인 것으로 전해졌다. 공관장 인사 발령에 따라 외교관 여권을 신청하고 발급하는 절차도 이때쯤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전 장관이 지난 1월부터 출국금지 조치됐다는 사실은 지난 6일 저녁에 알려졌다. 호주대사로 근무하려면 국내를 떠나야 하는데 출국 자체가 봉쇄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대통령실·외교부·법무부는 모두 “출국금지 사실을 몰랐다”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자 공수처는 7일 전격적으로 이 전 장관을 출석시켜 피의자 조사를 했다. 사건의 복잡성에 비해 상당히 짧은 4시간의 약식조사였다. 통상 이 전 장관과 같은 윗선 조사는 다른 하급자들을 두루 조사한 뒤 마지막에 한다. 이 전 장관에 대한 수사는 마무리 단계가 아니었고 압수물 분석도 완료되지 않았다. 법조계에선 공수처가 정무적 판단이 아니라 수사 필요성에 초점을 두고 원칙대로 수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공수처의 약식조사 다음에는 출국금지를 다루는 법무부로 공이 넘어갔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은 8일 오전 법무부 청사로 출근하면서 “어제 뉴스를 보니 (이 전 장관이 공수처) 조사도 간단히 받았다고 하고, 개인적인 용무나 도주가 아니라 공적 업무를 수행하러 간다고 봤다”고 말했다. 출국금지 해제를 시사한 것이다. 법무부는 이날 곧바로 심의위를 열어 출국금지 해제를 결정했다.
출국금지를 당한 사람이 이의신청을 냈을 때 법무부가 기각하는 비율은 80~90%대에 이른다. 형사정책연구원의 <현행 출국금지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보고서를 보면, 2016년에는 236건의 이의신청 중 229건(97.0%)이 기각됐다. 그만큼 법무부의 출국금지 조치는 푸는 것이 어렵다. 이의신청을 내자마자 인용한 이번 사례는 이례적이다. 공수처는 출국금지 해제에 반대 의사를 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법무부가 수사기관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했다는 점도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법무부가 이날 출국금지 해제 사유 중 하나로 전날 공수처의 이 전 장관 조사를 들었다. 결과적으로 공수처가 출국금지 해제의 명분을 제공한 셈이 됐다. 법무부는 이 전 장관이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밝힌 점을 고려했다고 했지만 수사 협조에 강제성은 없다. 법조계에선 이 전 장관 출국으로 공수처 수사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참여연대는 논평을 내고 “대통령실과 외교부가 공수처의 수사를 방해하거나 지연시키기 위해 범인 도피를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라며 “직권을 남용한 중대 범죄 혐의로 수사를 받는 피의자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외교관 자격이 있는지도 의문”이라고 했다. 한민수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법무부의 출국금지 해제에 대해 “핵심 피의자를 해외에 도피시키려 하다니 대한민국의 사법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릴 셈이냐”라고 했다.
https://m.khan.co.kr/national/court-law/article/202403080959001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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