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한때 애국자" 용주골 철거 막는 성매매 종사자들 [밀착취재]

윤준호 2024. 3. 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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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여성의날인 8일 당국과 대치
"한국전쟁 후 국가가 성매매 묵인
미군 대상 종사자, 애국자로 불려
철거 앞서 자립할 시간 달라" 주장
‘쿵’
담벼락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울타리에 올라가 있던 성매매 종사자였다. 파주읍행정복지센터가 경기 파주시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를 철거하려 하자, 성매매 종사자 80여명과 시민 20여명이 온몸으로 저지했다. 읍 관계자와 철거업체 직원, 종사자와 시민들 사이 아슬아슬한 대치는 1시간30분가량 이어졌다. 추락해 바닥에 주저앉아 어지러움을 호소하던 여성은 곧이어 도착한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됐다.
8일 경기 파주시 용주골에서 읍 관계자·철거업체 직원들과 대치를 벌이던 종사자가 울타리에서 추락 후 병원에 이송되고 있다.
국제여성의날인 8일 오후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 울타리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이번 철거는 파주시의 ‘용주골 지우기’의 일환이다. 울타리를 없애 집결지 내부를 감시하고 성매매 단속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종사자들은 “이주대책 등 대안이 미흡한 상황에서 단속만 강화하는 것은 그들의 생존과 인권을 외면하고 단순히 ‘눈앞에서 없애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발상이다”라며 맞섰다.

한국전쟁 직후 파주시에는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 기지촌이 형성됐다. 한때 전국에서 1000명 넘는 성매매 종사자가 모여 250여곳의 업소가 영업했다. 파주읍 연풍리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곳 ‘용주골’도 그중 하나다. 김경일 파주시장은 지난해 1월 새해 1호 공식 문서로 ‘성매매 집결지 정비 계획’을 승인하고 행정력을 총동원해 용주골을 폐쇄하겠다 밝혔다. 

파주읍은 이번 울타리 철거가 시설 노후로 인한 안전 문제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날 현장을 찾은 이창우 파주읍장은 “낡은 울타리는 철거하고 새로 가드레일을 설치하도록 예산을 확보해놨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종사자들은 기존 가림막 역할을 할 수 없는 가드레일은 종사자들의 밥벌이를 지켜줄 수 없다고 반박했다. 안전 문제를 내세웠지만 결국엔 종사자들을 옥죄기 위한 수단이라는 주장이다.

8일 경기 파주시 용주골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의 모습. 철거 안내와 철거 반대 펼침막이 걸려 있다. 울타리 건너편에는 성매매 반대 펼침막도 보인다.
종사자들은 철거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다만 그들이 나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철거 과정에서 의견을 반영해달라고 강조했다. 용주골 10년 차 종사자 별이(활동명)씨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고 거듭 말했다. 그는 “세금 한 푼 안 내고 사는 사람으로서 정부나 지자체가 주는 지원금에 욕심도 없고 단지 자립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는 것”이라며 “보통의 사람들이 꿈이 있듯 여기 아가씨들도 언제쯤 이곳 생활을 접고 자립할지에 관한 계획이 있었는데 시가 1년 만에 철거를 통보해 밀어붙이는 건 그 꿈을 짓밟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지난해 8월 시장과 형식적인 면담이 한차례 있었을 뿐 정작 종사자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는 부족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또 파주시가 종사자를 대상으로 한 자활지원조례 역시 공감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종사자가 이곳을 터전 삼아 살고 있고 적잖은 경우 한부모로 육아도 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약간의 지원금을 준다고 자립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여름(활동명)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활동가는 “불법적인 일이라고 하는데 사실상 한국전쟁 이후 국가가 성매매를 묵인했고 심지어는 미군 대상 종사자를 ‘애국자’라고도 칭했다”며 “당장 철거하겠다는 울타리조차 시에서 설치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젠 여기가 성업한다고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진 않지만, 필요 없으니 없앤다는 태도는 이중잣대”라고 꼬집었다. 

8일 경기 파주시 용주골 농성장 앞에서 여름 활동가가 팻말을 들고 서 있다.
이들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이해한다고 했다. 별이씨는 “똑같이 어려워도 모두가 성매매하는 건 아니라는 말에 반박하긴 어렵다”면서도 “그러나 날 때부터 성매매하려고 생각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또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버티는 사람들이 보기엔 우리가 한심하고 쉽게 돈 벌려고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 아가씨들은 각자의 사정 속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8일 경기 파주시 용주골 농성장 앞에서 별이(왼쪽)씨와 여름 활동가가 어깨동무하고 있다.
여성학 전문가인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성매매를 근절한다는 방향성만큼이나 과정이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허 조사관은 “종사자 가운데 가난한 가정에서 폭력에 노출됐던 이들이 많다”며 “이들이 자립할 수 있게 하려면 철거 등 폭력적인 방식이 아닌 충분한 시간과 진정한 지원, 구조적 문제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요가 없으면 형성될 수 없는 시장인 만큼 성 매수 수요를 제거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시는 2023년 1월부터 6차례에 걸쳐 종사자와 업주 대표 등과 면담을 실시했다고 설명했다. 시 관계자는 “파주시는 언제든 대화 요청에 응할 용의가 있으며, 2년이라는 지원 기간은 다른 지역의 조례와 비교했을 때보다 길다”고 말했다.

[반론보도] 「파주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 철거」 밀착취재 기사들 관련
 
본보는 지난 3월 8일 자 「"우린 한때 애국자" 용주골 철거 막는 성매매 종사자들 [밀착취재]」 제목의 기사를 비롯한 다수의 기사를 통해, 파주시청과 성매매 종사자들 간의 갈등 내용을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파주시청 측은 “집결지 폐쇄를 위해 성매매피해자, 업주 대표 등과 충분히 면담을 실시하였으며, ‘파주시 성매매피해자 등의 자활지원 조례’를 제정하여 자립기반 마련을 위한 생계비, 주거비, 직업 훈련비, 자립 지원금 지급 등의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다.
 
그리고 파주시 성매매 집결지 폐쇄 정책은 ‘용주골 지우기’가 아닌, 여성들에 대한 성착취를 멈추고 성매매피해자의 건강한 사회 복귀를 위함이며, 집결지 폐쇄 이후에는 이곳을 여성 폭력에 대한 기억 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다.”라고 알려왔습니다.
 
이 보도문은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파주=글·사진 윤준호 기자 sherp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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