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양간 정약용이 스님과의 우정을 꽃피운 절, 백련사 [정용식의 내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삼경에 비가 내려 나뭇잎 때리더니 숲을 뚫고 횃불이 하나 왔다오
혜장과는 참으로 연분이 많은지 절간문을 밤 깊도록 열어놓았다네”(견월첩에서)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빗속을 뚫고 온 혜장(1772~1811)을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낸 추억을 산행잡구(山行雜謳)로 남겨놓았다. 두 사람 관계의 애틋함이 서려 있다.
서울을 떠나 강진에서 유배생활하던 다산에게 학문의 벗이 되었던 혜장스님은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백련사 혜장스님이 본사 사찰의 부름을 받고 대둔사(해남 대흥사)로 돌아가려 하자 혼자 남겨질 것이 아쉬워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던 다산의 애절함도 전해진다.
견월첩(見月帖)은 다산 정약용이 훗날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와 주고받은 시문과 편지를 친필로 정리한 서첩으로, 혜장이 대둔사로 떠난 뒤 두 사람이 표현한 그리움과 아름다운 우정을 엿볼 수 있다. ‘견월’(달을 보다)은 불교 경전 ‘능가경’에 나오는 가르침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더니 손가락만 본다’는 ‘견지망월(見指忘月)’에서 가져온 말이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거닐며 둘이 나누었을 우정만큼이나 붉게 피어난 동백나무 숲을 보러 전라남도 강진 백련사를 다녀왔다. 이 지역은 유홍준 교수가 극찬한 ‘남도답사 1번지’이기도 하다.
강진에 접어들자 백련사 동백축제와 청자축제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여기저기 걸려 있다. 올해 처음 열리는 동백축제 일정에 강진청자축제도 시기를 맞춰 동시 개최하여 시너지를 내고자 한 듯하다. 백련사 남쪽과 서쪽 구간 5만㎡에 달하는 면적에 1500그루 동백나무가 밀집한 군락지가 있고 1km의 오솔길에는 높이 7m에 달하는 큼직한 동백나무도 즐비하다. 수령이 적게는 100년에서 길면 300년에 이르는 동백나무 군락지는 천연기념물 151호로 지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숲길이다. 이러한 만덕산의 빼어난 자연 환경과 백련사의 역사문화를 엮어 동백축제와 청자축제가 기획됐다.
종일 흐리다가 오후엔 이슬비마저 내리는데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러 왔다. 숲속에 걸린 ‘동백꽃에 취하고 싶다’는 문구처럼 취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동백꽃 망울만 드문드문 맺혀 있을 뿐이었다. 동백꽃은 피는 시기에 따라서 춘백, 추백, 동백으로 구분되며 백련사 동백꽃은 대부분 이른 봄에 피는 ‘춘백’이다. 이 글이 게재될 즈음엔 나무와 땅에서 활짝 핀 동백꽃 물결이 만덕산을 붉게 물들일 것 같다. 백련사에서 녹차밭을 거쳐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의 소나무, 황칠나무, 신우대와 함께 어우러진 동백나무 가지에도 봄볕이 내려 서서히 붉은 기운이 드러날 것이다.
백련사 만경루 앞에는 속세의 욕망을 벗어던지듯 껍데기를 벗고 매끈한 모습으로 줄기만 앙상한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절간 여기저기에 놓인 매화나무는 분홍색, 하얀색 꽃으로 봄의 시작을 알리고 있지만 배롱나무 쪽은 개화까진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고고한 기운을 자아내며 사람들을 주위에 불러모으는 매력이 있었다.
배롱나무는 모내기철이 되어서야 붉은 꽃을 피기 시작해 뜨거운 여름 내내 백일 동안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백일홍 나무라고도 하는데, 덕분에 백일홍은 어려움이 닥쳐와도 포기하지 않는 올곧은 지조를 상징한다. 서원, 사찰 고택들에 배롱나무가 흔한 이유이기도 하다. 200여 년 가까이 된 백련사 백일홍도 얼마 후면 꽃망울로 화사하게 치장하고 고고한 자태를 뿜어낼 것이다.
조계종 대흥사(大興寺) 말사인 백련사는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408m)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했다. 통일신라시대 무염(無染)이 창건해 절명을 백련사로 바꿔 불렀다고 하지만 무신정권 시대 1211년 원묘국사 요세(了世)가 크게 중창하면서 비로소 사찰로서 역할을 한 듯하다. 요세는 그의 제자 원영(元營)과 함께 20여 년 동안 가람 80칸을 짓고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여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백련결사(白蓮結社)라는 신행단체를 결성하였다. 이것은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구성된 혁신불교적인 신앙 결사단체인 순천 송광사의 수선사결사(修禪社結社)와 쌍벽을 이뤘다. 고려의 도읍이던 개경 중심의 귀족불교를 비판·반성하며 불자의 각성을 촉구하는 결사단체였던 것이다. 선종(禪宗)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하여 세를 키우고 있을 때 백련사는 천태 사상에 입각해 침체된 불교의 중흥을 꾀한 구심지 역할을 했다. 그 뒤 120년 동안 백련사에선 고려의 8국사(國師)가 배출됐다고 한다.
백련사는 토성에 둘러싸인 독특한 절이다. 외세의 잦은 침입으로 절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절 주위를 따라 쌓은 행호토성(行乎土城) 덕분이다. 주차장 앞 일주문과 사천왕상이 있는 해탈문을 지나 청정한 계곡 물소리와 동백나무 숲길 따라 올라가다 보면 토성 벽이 나오면서 백련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고운 자태의 배롱나무 뒤에 큼직한 2층짜리 누각인 ‘만경루’와 2층의 요사채가 절 전체를 품고 있다.
백련사를 답사한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일주문이 아닌 만경루가 우뚝 서서 자리 잡다 보니 백련사 절집은 오만할 정도로 불친절한 분위기를 연출한다’고 적었는데 그 의미가 조금은 이해된다.
만경루에는 축제기간이라 그러한지 강진만 일대의 바다와 창밖의 백일홍 나무를 감상하며 차 시음을 할 수 있도록 다도체험장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이 마셨던 그 차나무의 차 맛은 어떨까, 하는 마음으로 시음을 해보면 좋겠다.
만경루 좁다란 계단문을 지나면 곧바로 마주치는 대웅전의 ‘대웅보전’ 글자체가 사람을 압도할 만큼 웅장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식 건물로 1762년 건립됐다. 각 추녀마다 네 개의 활주(活柱)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다. 명부전, 응진당, 천불전, 삼성각 등의 건물들은 대웅전 한발 뒤에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범종각을 지나 다산초당 오솔길 방향으로 몇 발짝 옮기면 1681년에 세워진 백련사 사적비(보물 1396호)가 있다. 여기에는 백련사 중수, 원묘국사 행적, 백련결사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하는데 지금은 닳아서 알아볼 수 없다. 사적비의 받침돌(귀부)는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으나 비석은 유실되고 남겨진 원묘국사비 귀부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한다. 앉은키가 높고 용의 눈이 험상궂게 생긴 거북 모양의 귀부(龜趺) 위에 17세기 비신(碑身, 비의 몸돌)을 세운 것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양식이 한곳에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장대하다.
백련사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동국여지승람’에도 ‘남쪽 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백이 울창하여 동백 또한 곁들여서 수목이 싱싱하게 푸른 모습이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고 예찬한 바 있다.
신유사옥 때 강진으로 유배온 다산 정약용은 다산초당에 칩거하는 동안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교류했다. 정약용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 온 지 4년 후인 1805년 백련사의 아암 혜장선사(兒巖 惠藏禪師)를 찾아 ‘주역’과 ‘역경’ 이야기로 함께 밤을 지새웠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정약용이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잇는 1km 남짓한 오솔길을 하루가 멀다하게 오가며 학문적 교류를 했다고 한다.
승려임에도 유가와 도가에 관심이 많고 식견이 있었던 혜장선사와 경학(사람을 중시 여기는 유교경전)에 밝고 학문적 깊이가 남다른 다산은 열 살의 나이차와 유가와 불가라는 종교의 벽을 뛰어넘어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진솔한 만남을 가졌던 것 같다.
다산은 “나도 늙었구나, 봄이 되었다고 이렇게 적적하고 친구가 그립다니”라며 오솔길을 걸어 혜장선사를 찾아간다. 벗 삼을 만한 이가 없는 궁벽한 바닷가 마을에서 혜장은 다산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청량제 같은 존재였다. 두 사람은 수시로 기약도 없이 서로를 찾아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즐기기도 했다.
나아가 혜장스님은 그의 많은 제자들이 다산과 교류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흥사에 있던 초의선사(1786~1866)에게 다산을 소개시켜 줘 차를 중심으로 정약용 및 서울의 명망 있는 학자들과 교류하고 오랜 연을 갖도록 하였다.
혜장스님이 39세에 요절하자 정약용은 입적을 매우 슬퍼하며 탑명을 직접 써서 그를 기렸다. 마음 맞는 사람끼리 정담을 나누는 즐거움과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했던 마음들이 ‘견월첩’에 오롯이 기록되어 있고 정약용의 ‘만덕사지(萬德寺誌)’에 백련사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 가는 길, 야생차 군락을 지나 400m 지점에 갈림길이 있다. 왼편으로 100여m 내려오면 강진만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정자 ‘해월루’가 있다. 여기서 잠시 숨을 돌렸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실학정신을 꽃피운 숲길이요, 설렘을 품고 그리운 친구를 찾아가는 행복의 길이라 생각하며 걷다 보면 금방 다산초당이 나타나고 지척에 천일각(天一閣)이 있다.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이름이다. 흑산도에서 유배하는 형(정약전)과 승하한 정조가 그리울 때면 이곳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세운 것이다. 곧바로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현판이 붙은 동암(東庵)이 먼저 반기는데 다산이 목민심서를 비롯한 600여권의 책을 쓰는 등 집필에 몰두했고 실학을 집대성했던 곳이다.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조그만 산은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다. 작은 연못에 잉어도 키우며 말벗을 했을 것이다. 서암(西菴)은 강진유배 18년 중 10년을 이곳에서 머물며 18명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차를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했던 곳이다. 초당(草堂)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래는 작은 초가였지만 지금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집 형태로 바뀌어 있고 초당에 걸린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했다.
초당 뒤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정석(丁石), 다른 수식어는 없다. 자신의 성 정(丁)자와 석(石)만이 새겨진 바위는 유일한 말벗 혜장선사를 먼저 떠나보내고 유배지에 홀로 남은 외로움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는 듯해 애달프다. 그저 바위조차 친구로 삼고자 했던 것일까.
백련사 가는 길 강진 병영마을엔 돼지불고기 거리가 형성돼 있다. 10여 곳 식당마다 관광객, 등산객을 태운 대형버스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연탄불고기와 고등어구이 등 20여 남짓한 반찬이 남도 밥상 그대로다. 1인분에 1만5000원. 이 정도면 착한 가격이다. 식당가에서 백련사까진 23km 30여분쯤 걸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다.
글·사진 = ㈜헤럴드 정용식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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