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 마음 달랬더니 美 민주당 텃밭이 공화당에 넘어왔다 [노석조의 외설]
정치 신인 영킨, 지지율 낮은 트럼프와 거리
보수 가치는 부각하며 집토끼 챙겨
최대 논란 교육 이슈 파고들어 중도층 확보
미국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주요 의제 중 하나는 ‘성소수자’입니다. 얼마 전 ‘뉴스레터 외설’은 미국 성인 인구 가운데 성소수자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서부 캘리포니아(5.1%)가 아니라 뜻 밖으로 미 수도인 워싱턴 D.C.(14.3%)이라는 수치가 담긴 조사 보고서를 소개해드렸습니다.
더불어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의 지지세력의 한 축인 미 복음주의 교회에 대한 레터를 전해드리면서 워싱턴 D.C.와 인접한 버지니아 주(州)는 민주당 세(勢)가 우세하다는 점을 언급했습니다.
며칠 뒤 수십통의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그 중 한 메일을 계기로 조사한 바를 이번 뉴스레터에서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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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을 보내주신 분은 미국 모 대학의 교수님이셨습니다. 버지니아 주를 민주당 세가 강하다고 단칼에 말하는 것에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요점이었습니다. 그 조언을 마중물 삼아 리서치에 착수했습니다.
버지니아는 1960년부터 2004년까지 44년간대통령 선거에서 딱 한번을 빼고 내리 공화당 후보를 뽑았습니다. 1960년 대선은 민주당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 선거입니다. 그런데 당시 버지니아는 무려 약 6%포인트 넘는 표 차이로 닉슨을 택했습니다. 그 다음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를 찍었는데, 그 이후로는 계속 공화당 후보를 택했습니다.
클린턴이 대통령이 당선되던 1992년 대선과 재임에 성공한 1996년 대선 때도 버지니아는 공화당 후보 ‘픽(pick)’이었습니다.
이런 공고한 추세는 오바마를 기점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바마부터 버지니아는 최근 대선까지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민주당 후보를 택했습니다.
트럼프가 당선되던 2016년 대선 때도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습니다. 바이든 당선 때는 이례적으로 높은 54%이상의 득표율을 보였습니다. 트럼프는 10%포인트 이상 차이 나는 44.0%에 그쳤습니다.
버지니아는 과거 공화당세가 강한 빨간 주였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는 파란 민주당 텃밭이 됐습니다. 주당 2명 뽑는 상원의원 선거에서도 버지니아는 2006년부터 최근 2020년 선거까지 2명 모두 내리 민주당 팀 케인과 마크 워너에게 자리를 내줬습니다. 그 전에는 공화당이 상원 1석은 차지했는데, 이 마저도 민주당에 빼앗긴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변이 벌어졌습니다. 2021년 주지사 선거에서 2013년 이래 처음으로 공화당 후보인 글렌 영킨(Glenn Youngkin)이 50.58%로 48.64%인 민주당의 테리 맥컬리프를 이긴 것입니다.
영킨이 되기 전까지 버지니아 주지사는 2001년부터 2021년까지 20년간 밥 맥도넬이 2009년 딱 한 번 이긴 걸 빼고는 ‘파란색’이었습니다.
특히 당시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응 실패 논란에 휩싸인 트럼프 행정부와 공화당의 지지율이 뚝뚝 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안 그래도 버지니아는 민주당 텃밭이고 역시 민주당 텃밭인 워싱턴 D.C.의 인접 지역인데다 D.C.로 출퇴근 하는 근로자들이 많은 곳입니다.
그런데도 온갖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과반의 득표율로 12년만에 공화당 주지사가 탄생한 것입니다. 민주당에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진 뉴욕타임스(NYT)는 그의 승리에 대해 “놀라운 이변(remarkable upset)”이라며 “공화당의 새로운 스타(the newest star of the Republican Party)”라고 썼습니다.
그렇다면 영킨의 선거 승리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민주당 텃밭을 갈아업을 수 있었던 비결은 다음과 같이 분석됩니다.
1. 중도 유권자와 소통 강화: 영킨은 전통적인 공화당의 보수적 가치를 내세우면서도 중도적인 유권자들에게도 호소력 있는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교육, 경제 회복, 공공 안전과 같은 지역 사회의 우선 순위에 초점을 맞추며 다양한 유권자층에 어필했습니다. 주지사 선거는 대통령 선거와 달리 그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유권자들에게 호소력이 있습니다.
2. 교육 정책 강조: 교육 정책, 특히 학부모의 교육 과정에 대한 권리를 확대하겠다고 목소리 높였습니다. 학교에서 이뤄지는 인종 차별 교육 방침이 과도하고 정치 이념적이라며 학교에서는 정치 이념의 색을 빼야한다고, 그렇게 하겠다고 내세웠습니다. 인종 교육 문제는 당시 많은 유권자 사이에서 큰 관심사였습니다. 이에 학부모 사이에서 영킨에 대한 지지가 많이 나왔습니다.
3. 지지율 낮은 트럼프와 거리두기: 영킨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너무 가까운 느낌을 주지 않고 살짝 떨어져 있는 스탠스를 취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을 소외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캠페인을 진행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트럼프와의 공개적인 연결고리는 최소화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공화당의 전통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트럼프 지지층의 표를 확보했습니다. 예를 들어, 영킨은 강한 가족 가치와 기독교 신앙을 중시했습니다. 또 기업가 정신과 개인의 책임, 정부의 제한적 역할을 강조하는 등 보수적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당시 트럼프는 ‘부정 선거’ 음모론을 고집하며 중도층과 온건한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돼 이미지가 나빴습니다. 이에 영킨은 트럼프와 거리를 두면서도 공화당 ‘집토끼’는 챙길 수 있는 적정선을 찾는데 많은 노력을 했고, 이것이 주효했습니다.
4. 효과적인 캠페인 전략과 자금 조달: 영킨은 1966년생으로 기성 정치인이 아닌 기업인 출신이었습니다. 버지니아 태생으로 라이스 대학에서 기계공학과 경제학 학위를 받았고 하버드대에서 MBA를 했습니다.
유명 컨설팅 회사 맥킨지 앤 컴퍼니 출신으로 세계적인 사모 펀드인 칼라일 그룹(Carlyle Group)에서 공동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화려한 엘리트 기업 금융인 커리어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도 정치인에 대한 환멸감은 큽니다. 영킨은 자신은 비정치 출신으로 고인 물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해 호응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교육’이었다고 다들 입을 모읍니다. 왜 그런걸까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코로나 시기 버지니아뿐 아니라 미 여러 지역에서는 학교 커리큘럼, 수업 방식이 논란이 됐습니다. 한국도 그랬지만 코로나 시기 미국에서는 초등학교부터 비대면 영상 수업이 진행됐습니다. 그러면서 우연찮게 학부모는 자신의 자녀들이 집에서 줌(Zoom)으로 어떤 내용의 수업을 듣는지 자연스럽게 듣고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학부모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수업 내용에 상당히 정치적인, 이념적인 내용들이 포함된 것을 아이들의 비대면 수업 화면을 노트북으로 보고 알게 된 것입니다. 많은 교사가 정치 이념적 주장을 ‘고정된’ ‘굳어진’ 사실인 냥 가르쳤다고 합니다.
버지니아에서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비판적 인종 이론(CRT·Critical Race Theory)’이었습니다.
CRT는 미국의 인종차별이 개인적 편견이 아니라 교육, 법, 등 각종 사회 체계가 잘못 됐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라는 이론입니다. 일각에서는 이 이론 자체가 인종 간 분열을 조장하고, 인종 차별적 행위를 하는 개인의 책임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1970·80년대 떠올라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는 이론인데, 이를 일부 학교에서 당연한 것처럼 미성년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다 코로나 시기 학부모에게 들켜버린 것입니다.
학부모들은 학교 측에 이는 잘못된 정치적 세뇌 행위라며 그만 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는데요. 학교 측은 교과 과정과 방식에 개입하지 말라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영킨은 학부모도 교과 과정 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며 학부모 측의 대변자를 자처했습니다. 수업은 교사들이 알아서 할테니 학부모는 개입하지 말라는 학교 측에 맞서는데 앞장 선 것입니다. 영킨은 학부모의 교과 과정 참여권 증대를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한국은 두말할 것 없지만, 미국에서도 자녀 교육은 아주 민감하고, 보수와 진보, 좌와 우 상관할 것 없이 최대 관심사 중의 하나입니다. 한국 어느 국회의원은 사교육, 과학고·외고, 해외 유학을 맹렬히 비판하면서도 자기 자식들은 서울 모 외고에 진학시키고 미국 유명 대학으로 고액의 학비까지 내며 보내 논란이 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영킨이 이러는 동안 경쟁자인 민주당의 맥아울리프는 CRT에 대해 정반대의 입장을 보였습니다. 맥아울리프는 영킨이 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며 학생들은 다양성과 포용성있는 수업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교사들의 급여를 인상하고, 학교 시설 개선 및 교육 프로그램 확장을 통해 학생들에게 더 나은 학습 환경을 제공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러다 맥아울리프는 선거 기간 한 토론회에서 “나는 학부모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I don’t think parents should be telling schools what they should teach)”고 말해 화난 학부모 마음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교과 과정에 대한 학부모의 관심을 배척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입니다. 영킨은 더욱 학부모의 교육 과정 참여, 결정권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버지니아 거주 한인 시민권자 한 분은 “적지 않은 민주당 지지자들도 맥아울리프의 발언에 분노했었다”면서 “그들이 볼 때도 학교의 교육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는데 학교가 이런 학부모 의견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해 분개했다”고 말했습니다.
영킨이 이런 학부모의 마음을 달래며 지지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 덕에 영킨은 12년만에 주지사 고지에 공화당 깃발을 꽂으며 탈환하는 이변을 이뤄냈습니다.
영킨은 정치 신인이었습니다.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가 그의 첫 출마였습니다. 반면 민주당 맥아울리프는 2014년부터 2018년까지 버지니아 주지사를 지낸 베테랑 정치인이었죠. 그런 그가 자기 정당의 텃밭이자 과거 그의 무대였던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판에서 정치 경력 ‘제로(0)’인 영킨에게 패했습니다.
조지타운 정치학 박사들에게 물어보니 영킨의 선거 승리 비결은 미 공화당뿐 아니라 민주당에서도 주요 참고 사례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특정 정당의 텃밭이라도 유권자가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고들면 얼마든지 뺏을 수 있다, 영원한 텃밭은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국 총선에서는 이런 이변이 얼마나 일어날까요?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모두 각각 텃밭 지역구를 두고 있습니다. 총선 승리는 어느 당이 더 많이 뒤집느냐에 달렸겠지요. 그 결과는 알 수 없지만 하나는 분명합니다. 뒤집느냐 마냐는 유권자만이 할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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