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되고 싶다면 뇌부터 개조시켜라
뇌의 자아형성 과정 밝혀내
정체성은 선택적 기억 집합
불완전한 만큼 바뀌기 쉬워
'미래의 나' 실마리 찾을수도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남겼다. 쉽게 말해 인간이 생각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한다는 것이므로 이는 곧 '나'의 존재를 의미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같은 철학적 접근에 한 과학자가 의문을 제기했다. '나'로 칭해지는 자아와 기억, 믿음 따위는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뇌가 스스로에 대해 만들어낸 허구이자 망상이라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생각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아의 존재를 깨쳤다면, 현대 뇌과학은 우리 뇌가 어떻게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는지를 보여준다.
''나'라는 착각'은 세계적인 신경과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그레고리 번스 미국 에머리대 심리학과 교수가 뇌과학적인 관점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아 정체성(우리가 스스로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의 기원과 형성 과정, 변화 등을 분석한 책이다. 지난 20여 년 간 그가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 등을 활용해 인간 심리를 결정짓는 뇌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분석해온 연구 결과를 총망라했고, 이를 토대로 인간이 스스로를 스스로이게끔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추적했다. 미신이 어떻게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는지도 살펴본다.
자아 정체성이 의식의 결과라는 점은 분명하다. 많은 SF(공상과학)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나'를 '나'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은 주로 과거의 기억, 즉 경험에 대한 스토리로 그려진다.
예컨대 미국 HBO의 드라마 시리즈 '웨스트월드'에서는 인간이 게임을 위해 만든 복제인간에게 자아 정체성(캐릭터)을 형성하기 위해 여러 에피소드 기억을 주입시킨다. 저자는 우리 뇌가 이런 과거의 기억 조각들로 한 편의 거대한 서사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과거의 자아가 현재와 미래까지 하나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듯한 착각을 만들어낸다는 데 주목했다.
뇌가 자아 정체성의 토대를 형성하는 과정은 유아기와 청소년기에 걸쳐 크게 다섯 단계로 진행된다. 첫 단계인 2~3세 아이들은 자신들이 과거를 갖고 있고 이를 설명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3~5세 즈음에는 자기 가족과 또래가 겪은 사건들까지 자기 삶에 끼워넣기 시작하고, 직간접적인 경험을 다른 사람과 공유한다. 이를 통해 뇌는 중요한 피드백을 받게 된다. 5~9세엔 이야기의 레퍼토리를 계속 늘려나가고 마지막 단계인 9세에서 사춘기까지는 안정화를 거친다. 이때부터는 새로운 사건이 진행 중인 서사에 들어맞지 않으면 뇌는 이야기를 바꾸거나 사건을 포기한다.
물론 이런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자아 분열, 다중 인격 장애 같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번스 교수가 뇌가 만든 자아 정체성을 '착각' '허구' '망상' 등으로 표현한 것은 인간의 뇌가 카메라나 컴퓨터 저장장치처럼 완벽한 기록 장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의 단편적인 기억들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우리 뇌의 다중 기억 시스템 안에서 인식, 축약, 편집, 추측되고 그 과정에서 왜곡되기도 한다. 그리고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의 자아가 어떠할지에 대한 예측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는 우리 뇌의 이런 불완전한 특성 덕분에 자아를 과거에서부터 흘러온 서사에 가두지 않고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가 믿는 이야기가 나를 만든다는 뜻이다. 영화 '인셉션'(2010)에서 무의식 속에 저장된 기억을 수정해 자아 정체성을 바꾼 원리와 비슷하다. 번스 교수가 제안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수많은 스토리를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게 해주는 독서다. 어떤 자아가 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이를 강화할 수 있는 책을 골라 읽으라는 것이다. 책은 이를 위한 실용적인 조언도 제시한다.
실제로 책은 우리 뇌를 변화시킨다. 일례로 번스 교수팀은 18~19세를 대상으로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 '폼페이'(2003)를 읽게 하고 fMRI로 뇌 변화를 살폈다. 그 결과 소설 안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개인적인 서사에 통합된 것으로 나타났고, 이는 뇌의 활동 패턴에 지속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번스 교수는 책에서 "역사 소설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운명을 결정할 선택의 순간을 서사 속에서 계속 마주하게 된다. 과거의 이야기로 만들어졌듯이 이야기는 미래의 당신을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다.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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