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 기자의 책에 대한 책] "늦은 저녁의 노크소리…성경 상인이 내게 이상한 책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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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모래의 책'은 이런 줄거리다.
한국에서 민음사 보르헤스 전집 제5권 '셰익스피어의 기억'에 수록된 '모래의 책'은 여덟 쪽의 초단편 분량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 대표작으로 꼽힌다.
'모래의 책'에 나오는 기괴한 책은 인간의 유한한 인지능력과 끝도 없이 펼쳐지는 세계의 무한성을 대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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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모래의 책'은 이런 줄거리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북부의 벨그라노에 거주하는 주인공 '나'는 대문을 두드리는 이방인의 노크 소리를 듣는다. 문을 여니 성경을 파는 상인이었다. 낯선 남자는 성경 더미 옆에서 책 한 권을 꺼낸다. 펼쳐보니 낯선 문자로 가득하고 페이지 번호가 뒤섞인 기괴한 책이었다. 어떤 페이지엔 '40514쪽', 다음 페이지는 '999쪽', 한 장을 더 넘기니 '8개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펼칠 때마다 문장과 삽화가 달라졌다.
'나'는 "어떤 페이지도 첫 페이지가 될 수 없고, 그 어떤 페이지도 마지막 페이지가 될 수 없는" 무한한 책을 성경 상인에게서 구매한다.
그런데 그 뒤로 주인공은 침상에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 불면의 밤을 지탱하는 건 '불가능한 책'을 읽는 일이다. 겨우 잠든 날엔 꿈에서도 저 책이 등장해 '나'를 괴롭힌다. 그럼에도 책을 도난당할까봐 전전긍긍하던 주인공은 외출까지 삼가고 책의 수인(囚人) 신세가 된다.
'나'는 결국 90만권 책이 소장된 국립도서관으로 가서 사서들이 한눈을 파는 사이에 저 책을 몰래 숨긴다. 다시는 도서관의 근처에도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한국에서 민음사 보르헤스 전집 제5권 '셰익스피어의 기억'에 수록된 '모래의 책'은 여덟 쪽의 초단편 분량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 대표작으로 꼽힌다. 처음도 끝도 없는 모래 같은 책에 빠져드는 인간을 응시함으로써 '무한 앞에 선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책은 세계를 담는 문자적 그릇"이란 명제를 기억해보자. 세계를 한 권의 책에 담아내기 위해선 무한한 종이와 무한한 잉크가 필요할 것이다. '모래의 책'에 나오는 기괴한 책은 인간의 유한한 인지능력과 끝도 없이 펼쳐지는 세계의 무한성을 대비시킨다. 일시적인 인간과 영원한 책(세계). 인간이 죽어도 세계는 변화하며 존재한다. 어제 본 하늘과 오늘 본 하늘이 같지 않은 것처럼. 그럼에도 인간은 하늘을 보려 한다.
소설 '모래의 책'을 사랑하는 한 학자는 오래전 웹사이트 북오브샌드넷(bookofsand.net/hypertext)이란 홈페이지를 구축해 지금도 운영하고 있다. '모래의 책'을 하이퍼텍스트로 옮겨놨는데 '999' '40,514' '71,077,345' '11,111,000,101' 등의 숫자는 보르헤스가 설계한 우주로 가는 초청장처럼 보인다. 물론 저 웹사이트의 구성이 실제로 무한한 건 아니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상상력을 간접 경험할 수 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우주를 느끼는 순간은 그 자체로 자유다.
무한(無限)은 보르헤스 문학을 관통하는 주제였다. '바벨의 도서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과 같은 단편도 무한에 대한 보르헤스적 탐구의 결과물이다. 그는 "장편은 독자를 향한 아첨"이라며 단편에만 매진했는데, 그 간결성 때문에 오히려 선구자가 됐다.
인간은 얼마나 작은가. 그러나 인간의 상상력은 얼마나 큰가.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은 바로 그 점을 질문한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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