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이정후의 시범경기 초반 기록이 의미하는 것들

이성훈 기자 2024. 3. 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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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수다]
이정후가 시애틀 매리너스와 첫 시범경기에서 안타를 치고 있다. (사진=AP, 연합뉴스)


(한국 시간) 2월 28일, 이정후는 여러모로 강렬한 시범경기 데뷔전을 치렀다. 시애틀 매리저스 전 1회 첫 타석에서 올스타 투수 조지 커비로부터 우전 안타를 뽑아내 '역시 이정후'라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4회에는 다른 의미로 눈에 띄는 장면이 나왔다. 시애틀의 세 번째 투수 카를로스 바르가스에게 헛스윙 삼진을 당한 것. 바르가스가 평균 시속 159.6km의 '광속구'를 뿌리는 유망주이기는 하지만, 이정후의 삼진은 놀랍고 희귀한 결과였다.

앞서 여러 차례 소개한 대로 이정후는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콘택트 히터, 즉 삼진을 잘 당하지 않는 타자다. 이런 이정후가 첫 경기부터 삼진을 당하면서, '천하의 이정후라도 역시 메이저리그에서는 고전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빠른 공에 약점이 있다'는 오랫동안 떠돌던 소문도 사실로 굳어지는 듯했다.

그 뒤로 비로 취소된 8일 LA 다저스 전 1회까지 이정후는 15타석 더 등장했다. 이 15타석에서 이정후가 당한 삼진은? 한 개도 없다.

시범경기 기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게 지배적 견해다. 하지만 야구 연구계에서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미가 있는 기록도 있다'고 말한다. 세이버메트릭스 전문 사이트 '팬그래프'에 2012년 올라온 글을 보면, 시범경기의 삼진-볼넷 비율은 정규시즌 기록을 짐작하는 근거로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지난 정규시즌보다 시범경기에서 갑자기 삼진 비율이 낮아진 타자는, 시즌 중에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수학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시범경기와 정규시즌 삼진 비율의 '상관 계수'는 0.5다)

만약 이정후가 데뷔전처럼 시범경기 내내 삼진을 당했다면? 콘택트 능력을 최대 무기로 앞세워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이정후에게는 대단히 암울한 신호였을 것이다. 반대로 지금처럼 삼진을 계속 잘 피한다면? 이정후의 최대 강점이 메이저리그 투수들에게도 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긍정적인 신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세이버메트릭스계에서는 삼진 비율보다 '시범경기-정규시즌 상관관계'가 더 높은 기록이 있다고 말한다.

지난해 3월 'prospects live'에 실린 글에 따르면, 타자의 '최대 타구 속도'는 삼진 비율보다 더 '정규 시즌 예측력'이 높다. 시범경기에서 타구 10개, 정규시즌에서 타구 20개 이상씩을 기록한 타자들의 '최대 타구 속도의 상관 계수'는 0.578이다. 쉽게 말해서, 시범경기에서 강한 타구를 날린 타자는, 정규시즌에서도 강한 타구를 날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미국 현지의 많은 통계 분석 칼럼니스트들이 이정후가 첫 홈런을 친 지난 1일 경기를 주목한 이유다. '야후스포츠'에 올라온 글의 한 대목이다.

"시범경기에서 단정적인 결론을 낼 수는 없지만, 이정후의 시속 109.7마일(176.5km) 짜리 홈런은 이정후가 최소한 메이저리그 평균 수준의 파워를 갖고 있다는 걸 뜻한다. 호세 알투베, 댄스비 스완슨, 브라이언 스톳은 모두 빅리그의 수준급 타자들이지만, 아무도 그렇게 빠른 타구를 치지 못했다."

지난해 빅리그 최고 타율-최소 삼진 비율을 기록한 루이스 아라에스(마이애미)는 이정후와 가장 비슷한 유형의 타자로 꼽힌다. 하지만 지난해 아라에스의 최고 타구속도는 104마일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시범경기 기록만 봐도, 파워는 아라에스보다 이정후가 더 셀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이정후의 첫 홈런은 또 다른 화제도 만들었다. 'baseballsavant.com'에 따르면, 그 타구는 메이저리그 30개 구장 중 29개 구장에서 홈런이 된다. 홈런이 되지 않는 단 하나의 구장이 바로 샌프란시스코의 홈구장 오라클 파크다. 우중간 가장 깊은 곳이 홈플레이트로부터 126미터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앞서 소개한 대로 오라클 파크는 좌타자, 더 정확히는 '왼손 홈런 타자'에게 매우 불리하다.

하지만 이런 홈구장의 특성이 이정후에게 불리하게만 작용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 오라클 파크의 우중간은 ‘Triples alley : 3루타 골목’이라고 불린다. 워낙 깊어서 우중간을 가르는 타구를 중견수와 우익수가 쫓아가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다른 구장이었다면 2루타로 만족할 타자들이 3루로 가기에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정후는 ‘뜬공 타자’가 아닌 ‘라인드라이브’ 타자다. 왼손 라인드라이브 타자가 친 타구가 가장 자주 향하는 곳은 우중간이다. 빠른 라인드라이브 타구가 ‘3루타 골목’에 빠지면, 이정후의 스피드면 3루를 충분히 노릴 수 있다.

게다가 이정후는 홈런을 친 날, 속도도 우리의 생각보다 빠르다는 걸 검증받았다. 밥 멜빈 샌프란시스코 감독은 그날 경기 후, “이정후가 홈에서 1루까지 뛰는데 4.1초가 걸렸다”며 놀라워했다. 지난해 메이저리그에서 홈에서 1루까지 10번 이상 뛴 타자는 583명. 이 중 홈에서 1루까지 가는 평균 시간이 4.1초 이내였던 선수는 단 4명뿐이다. 즉 이정후가 ‘작정하고 뛰면’ 빅리그에서도 수준급의 스피드를 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3루타 골목’을 이용할 또 다른 재능을 갖춘 셈이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이성훈 기자 che031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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