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앞두고 공연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정치와 무관” [인터뷰]
관객 눈높이 맞춰 캐스팅ㆍ무대 변화
韓 뮤지컬 亞 1등…해외 관객 모아야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우리가 꿈꾸는 정의는 무엇인가.”
최근 개막한 제작사 EMK뮤지컬컴퍼니 ‘마리 앙투아네트’(5월 26일까지·디큐브 링크아트센터)의 홍보 문구다. 프랑스 혁명기, 굶주림에 지친 시민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했다는 출처불명의 망언, 조작된 다이아몬드의 사건,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려다 붙잡힌 바렌 도주 사건, 갖가지 염문설…. 뮤지컬은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혁명을 이끄는 가상 인물 마그리드의 삶을 대조적으로 그린다.
엄홍현 EMK뮤지컬컴퍼니 대표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마리 앙투아네트’ 개막 전부터 여러 곳에서 전화를 엄청 받고 있다”고 했다.
“총선 앞두고 이 작품은 왜 하는 거냐?”, “EMK의 정치색이 뭐냐? 요즘처럼 민감한 시기에 괜찮겠냐”는 질문이 다수를 이룬다. 지난달 김경률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이 김건희 여사를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한 발언이 회자되며 연쇄적으로 끼친 영향이다.
엄 대표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2년 전 대선을 하기도 전에 공연 시기와 대관을 확정한 작품”이라며 “정치 성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공연인데 연락을 너무 많이 받아 힘들었다”며 당혹스러웠던 최근의 일화들을 들려줬다.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의 올해 공연은 10주년을 맞은 ‘그랜드 피날레’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2014년 한국 초연 이후 네 번째 시즌으로, 리뉴얼 전 현재의 프로덕션으로는 마지막 작품이다.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1981)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EMK가 호흡을 맞춰온 ‘엘리자벳’, ‘모차르트!’, ‘레베카’의 미하엘 쿤체 작가와 실베스타 르베이 작곡가 콤비의 합으로 태어났다. 작품은 일본 공연 제작사 토호가 지난 2006년 초연한 이후 EMK가 라이선스로 들여왔다. 섬세한 만듦새로 우리 정서에 맞게 태어난 한국 버전은 이후 일본으로 역수출되기도 했다.
엄 대표는 “사실 일본 버전에선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가 굉장히 과한 것으로 묘사된다”며 “쿤체 작가가 한국에서 (무대에) 올릴 때 공부를 더 많이 한 뒤 자라온 환경의 문제로 오해가 있었을 뿐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인물에 대한 평가는 관객에게 맡겼다”고 설명했다.
2009년 뮤지컬 산업에 뛰어든 후발주자인 EMK뮤지컬컴퍼니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해 ‘모차르트!’, ‘몬테크리스토’, ‘레베카’ 등 스테디셀러 작품들로 10년 이상 관객과 만났다.
엄 대표의 철칙 중 하나는 초연 10주년을 맞은 작품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뒤바꾼다는 것이다. 지난해 무대에 오른 ‘모차르트!’, 지난달 막 내린 ‘몬테크리스토’가 대표적이다. 그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제작비가 부담돼도 시대 변화에 맞춰 작품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관객에 대한 예의”라며 “지금보다 더 빠른 속도로 변화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은 한국인의 정서, 시대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 공연 관람 환경의 변화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다음 시즌도 대대적인 변화가 예고됐다.
“부의 상징인 귀족이 무대 위쪽에서 군중을 아래로 짓누르는 것처럼 연출한 부분을 바꿔볼 생각이에요. 다음 시즌엔 좌우 구도로 귀족과 군중을 배치해 서로 밀고 당기는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보다 현재의 정서에 잘 맞는다는 판단이 들어요.”
지난 한 해 EMK뮤지컬컴퍼니는 특히나 바빴다. 대형 뮤지컬 제작사로는 흔치 않게 창작 뮤지컬을 꾸준히 올리면서도 기존 스테디셀러 공연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선보였다. 창작 뮤지컬 ‘베토벤’부터 ‘모차르트!’, ‘프리다’, ‘레베카’, ‘벤허’, ‘시스터액트’, ‘몬테크리스토’ 등을 무대에 선보였다. 올해에도 신작 ‘베르사유의 장미’를 올릴 예정이다.
엄 대표는 “코로나19 이후 문화 수요가 폭발할 것이라 판단했다. 지금이 노를 저을 때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무리해 저었다”며 웃었다.
EMK가 주도한 한국 뮤지컬 산업의 변화가 많다. 그는 대작 뮤지컬 시대를 선도했으며, 뮤지컬계의 ‘스타 캐스팅’의 서막을 연 주인공이다.
특히 엄 대표는 ‘모차르트!’를 통해 1.5세대 K-팝 그룹 동방신기·JYJ 출신 김준수를 뮤지컬 배우로 데뷔시킨 주인공이다. SM과 전속계약 분쟁으로 방송 출연을 못할 당시 무대 경험이 없던 김준수를 파격적으로 캐스팅, 대성공을 거뒀다. 당시를 떠올리며 엄 대표는 “혜성처럼 나타난 김준수라는 친구가 ‘모차르트!’의 성공을 이끌었다”며 “김준수가 아니었으면 망했다”며 웃었다. 이후 김준수는 뮤지컬계 최고의 티켓 파워로 떠오르며 현재의 자리에 올랐고, 그의 등장 이후 뮤지컬계는 ‘스타 캐스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지난 10여년 간 한국 뮤지컬계를 돌아보며 그는 “관객들의 수준과 취향이 굉장히 까다로워졌다는 것을 체감한다”고 말한다. 엄 대표는 “이전엔 아이돌을 캐스팅하면 기본적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긴다고 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며 “배우들 사이에도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심해졌다”고 말했다.
“미국 브로드웨이나 영국 웨스트엔드에 가서 공연을 보는 것도 흔해지고, 한국에서도 공연 문화가 어느 정도 자리잡아 관객의 눈높이가 굉장히 높아졌어요. 관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작품도 좋아야 하고, 캐스팅도 잘해야 하고, 공연장 로비까지 신경써야 해요.”
최근 뮤지컬 업계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높아진 티켓 가격으로 대형 뮤지컬의 재관람율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뮤지컬 산업은 N차 관람을 하는 이른바 ‘회전문 관객’과 함께 성장했다. 주연 배우들이 3~4명씩 같은 배역에 캐스팅되면 이들의 조합을 바꿔가며 공연을 감상하는 뮤지컬 덕후, 특정 배우의 거대한 팬덤의 N차 관람으로 지탱해왔다.
엄 대표는 “현재는 관객들이 1순위 배우의 공연만 볼 뿐, 2~3순위 캐스팅은 보지 않는다”며 “이런 쏠림 현상으로 향후 2~3년 내엔 주연 캐스팅도 최대 더블 캐스팅으로 바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티켓 값 인상까지 더해지니 관객들의 지갑 사정도 나빠졌다. 하지만 티켓 가격 인상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그는 “물가가 떨어지지 않는 한 올라갈 수밖에 없다”며 “브로드웨이처럼 장기 공연이 가능하고 배우들을 전속 단원으로 고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면 달라지긴 어려운 흐름”이라고 했다.
실제로 지난 10여년 새 인건비, 대관료, 세트 제작비, 의상, 조명 등의 모든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랐다. 대관료는 10년 사이 2~2.5배가 올랐고, 제작 비용은 10배 넘게 치솟았다. 때문에 뮤지컬 업계에선 새로운 관객 개발이 시급하다. 떨어지는 재관람율을 방어할 관객들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엄 대표는 그 해답을 외국인 관객에게서 찾고 있다.
그는 ”최근 규현의 ‘벤허’ 공연엔 외국인 관객이 30%에 달했다”며 “최근에는 당일치기로 공연을 보고 귀국하는 일본 관객도 많고, 중국·싱가포르에서 1박2일로 공연을 보러 온다”고 말했다. 김준수가 출연하는 뮤지컬 역시 일본, 중국 등 아시아 전역의 관객들이 모인다.
엄 대표는 “지금의 한국 뮤지컬은 아시아 1등이라고 자부한다. 외국인 관객의 수요가 높은 만큼 이들만을 대상으로 한 객석이나 회차를 마련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해나가며 관객 개발을 이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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