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의사과학자 양성 기회 살린 서울대, 기회 잃은 KAIST
서울대가 내년도 의대 입학 정원을 65명 늘려달라고 교육부에 요청했다. 증원을 요청한 65명 중 15명은 기존 의예과 정원에, 나머지 50명은 새로 신설하는 의과학과에 배정하겠다고 했다. 의예과가 주로 환자를 돌보는 임상의사를 양성하는 과정이라면, 의과학과는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한 특화 과정이다. 이미 대학원 과정에서 운영하는 의과학과를 학부 과정으로 확대해 대학 입학 때부터 의사과학자의 자질을 갖추도록 하겠다는 서울대의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 중이다.
의사과학자는 의료 면허를 갖고 있으면서 이공계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다. 환자를 진료하는 대신 신약과 의료 장비를 연구하는 역할을 하는 특화된 인력이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중 절반 가까이가 의사과학자 출신이다. 정부도 세계 수준의 바이오 산업의 육성을 위해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한 교육 제도 마련에 나서고 있다.
서울대처럼 의사과학자 양성을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학교는 여러 곳이 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대표적인 사례다. 사실 KAIST는 의사과학자 양성의 필요성을 서울대보다 앞서 깨닫고 지난 2004년 의과학대학원을 설립했다. 그 뒤 지금까지 약 200명의 의사들을 과학자로 배출하며 꽤 ‘성공한’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의 척박한 의사과학자 양성 생태계에서 단비 같은 역할을 해 온 것이다.
하지만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과기의전원) 신설을 준비해 온 KAIST의 계획은 수년째 제자리 걸음을 걷고 있다. 이번 의대 증원에서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기존 국내 40개 의대들을 중심으로 의대 입학 정원을 늘리다보니 아직 학교를 세우지 못한 KAIST는 정원을 확보하지 못했다. 20년 가까이 의사과학자 양성에 앞장서 온 KAIST지만 의대 신설의 기회조차 받지 못하면서 과학기술계에서는 아쉬움의 목소리가 나온다.
의사과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한 과학자는 “국내 의료·바이오 산업의 육성이라는 측면에서 어느 기관이 의사과학자 양성을 주도하던 큰 문제는 없다”면서도 “KAIST가 가진 노하우와 과학·공학 교육에 대한 DNA를 활용했어야 한다”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또다른 의사과학자는 노무현 정부에서 도입했다가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 의학전문대학원(의전원)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KAIST 같은 혁신 모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의전원은 다양한 배경 지식을 가진 학생을 의사로 육성해 의료와 연구를 함께 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한다는 목표를 갖고 추진됐다. 하지만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현재는 차의과대를 제외한 모든 대학이 의전원을 없애고 다시 의대 체계로 돌아갔다.
그는 “서울대도 의전원 체제를 5년 만에 접었다”며 “이번에는 학부 시스템이지만 얼마나 지속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고 지적했다. 또 “성공한 사례를 가진 KAIST의 경험과 노하우를 활용하는 방안이 우선 검토돼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KAIST가 올해 의대 정원을 받지 못한 것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2월 KAIST를 방문한 자리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과기의전원 설립에 부처가 지원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부의 특별한 조치는 보이지 않았다.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지난달 ‘2024년도 주요정책 추진계획’을 발표하면서 “과기의전원 설립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이미 의대 정원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화되던 상황에 늦어도 너무 늦은 발표라는 지적이 현장에서 나왔다. 구체적인 추진 계획도 내놓지 못했다. 그저 과기정통부가 적극적으로 관계부처와 협력해 나가겠다는 ‘선언적 의미’에 불과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물론 의사과학자 양성을 KAIST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찌보면 기존 의대를 활용하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의대 증원은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해 다시 없을 기회라는 점은 분명하다. 인술을 펴는 의료인을 양성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또 한편에서 미래 한국을 먹여 살릴 인재 육성에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정부에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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