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 유감[살며 생각하며]

2024. 3. 8.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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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옛날엔 글을 쓴다고 했지만
요즘은 친다고 해야 더 정확
변시·입법고시도 CBT 도입
99%가 수기 아닌 자판으로
이젠 옛문화 돼버린 손글씨
필체의 멋·개성은 뒤안길로

최근에 책을 한 권 썼고, 논문을 한 편 썼다. 컴퓨터 자판을 열심히 쳐서 원고를 작성하였다. 그러니 책을 한 권 쳤고, 논문을 한 편 쳤다고 말해야 정확한 표현이다. 그래도 책을 친다고 하면 틀린 말이다. 컴퓨터 자판을 치거나 휴대전화 자판을 눌러서 글을 쓰기는 하지만 그래도 글을 ‘두드린다’ ‘누른다’고 하지는 않는다. 각양각색의 글을 손으로 써 온 관행이 너무 오래이기 때문이다. 붓이든 만년필이든 아니면 볼펜이든 연필이든 필기도구로 글을 쓰고 글씨를 쓴 역사는 2000년이 넘는다. 긴 역사 속에서 손과 손가락으로 필기도구를 쥐고 글씨를 써서 글을 지었다. 손으로 글씨를 써야만 글을 지을 수 있었다. 쓴다는 말과 짓는다는 말은 구분할 필요가 없는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도 크게 달라졌다.

현대는 글씨를 쓰는 것보다 자판을 치는 것이 글을 짓는 일반적 방법인 디지털 세상이다. 글씨를 쓰는 것은 점차 아날로그 문화가 되어간다. 가면 갈수록 글씨를 쓸 일이 많지 않다. 그나마 글씨를 써야 할 상황은, 배움의 과정에 있는 학생이나 각종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이 필기하거나 답안을 작성할 때이다. 특히 제한된 시간에 논술시험을 치를 때이다. 논술시험에 답안을 작성하며 글씨가 잘 써지지 않아서 고생을 한 사람이 적지 않다. 글씨 쓰는 연습을 많이 하지 않은 사람이나 악필이 심한 사람은 특히 곤욕을 치른다. 힘들게 답안을 작성하고 나서도 채점자가 알아보지 못해 감점받지나 않을지 내심 불안해하기도 하다.

대학 강의나 입학시험 논술시험에서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와 답안지에서 천차만별의 글씨를 보아왔다. 반듯하고 또박또박 쓴 글씨부터 이른바 지렁이체까지 다양하다. 정도가 심해 내용을 파악하기 힘든 글씨도 더러 있다. 갈수록 학생들의 글씨는 더 나빠져 알아보기 힘든 리포트와 답안이 많다. 글씨가 좋지 않다고 감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잘 쓴 글씨와 못 쓴 글씨의 답안 사이에 호감과 비호감에 따른 점수 차이가 없지는 않다. 정말 알아보기 힘든 경우에는 감점하기도 한다.

대학 입학시험이나 변호사시험을 비롯한 각종 국가고시에는 논술시험이 있고, 두말할 필요 없이 자필로 답안을 써야 했다. 논술시험에서는 글씨를 빠르게 잘 써야 한다. 인생 경력에서 정말 중요한 시험에 글씨를 또박또박 잘 쓰고 또 빠르게 쓸 수 있다면 그것도 무시 못 할 경쟁력의 하나이다. 답안이 악필이라 알아보기가 힘들다면 아무래도 채점자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다. 당황하거나 조급하면 글씨는 더욱 엉망이 된다.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악필이 심한 경우에는 채점자에 따라서는 감점을 당할 가능성도 있다. 알아보기 힘든 악필이 있고, 필체 교정까지 받는 수험생이 있다.

올해에는 그런 중요한 시험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변호사시험과 입법고등고시에서 컴퓨터 작성 방식(CBT)을 도입하였다. 손글씨 방식과 함께 컴퓨터 자판으로 답안을 작성하는 방식을 시행하였다. 올해 시행된 제13회 변호사시험에서 처음으로 두 방식 가운데 응시생이 선택하여 시험을 치르게 하였는데, 99.2%가 컴퓨터 작성 방식을 택하였다고 한다. 이 정도면 압도적인 호응이다. 글씨를 빠르게 잘 쓰는 응시생조차 선택을 고민하지 않았다. 악필을 우려하지 않아도 되고, 답안 작성에 드는 시간이 더 빨라지며, 수정하기가 편리해졌으니 수기 방식보다 훨씬 이점이 크다고 할 것이다. 시행 초기라 두 가지 방식을 선택하게 했으나, 수기 방식은 선택지로 굳이 고려할 필요가 없을 수준이다. 이 추세라면 앞으로는 각종 국가고시의 논술형 시험에는 컴퓨터 작성 방식이 보편화할 것이고, 더 나아가 대학입시 논술시험 등에도 도입될 것으로 예상한다.

그동안 논술형 답안을 쓰는 영역에서는 자필로 글씨를 써야만 했었다. 그 영역에서도 이제는 답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치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글씨 쓰는 속도나 악필의 여부에 따라 일어나던 차이가 사라졌으므로 더 빠르고 더 공정하다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세상에서 글씨의 개인적 차이가 남아 있던 영역조차 이제는 사라졌다. 발전이라면 적지 않은 발전이다. 나의 경우에도 예전에는 학생들에게 리포트를 반드시 자필로 써서 제출하도록 하였으나 몇 년 전부터는 그런 제한을 두지 않는다. 자료를 긁어오는 문제 등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으나 디지털 세상에서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자필로 리포트를 제출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런 변화를 우리 세대는 20대 후반부터 겪기 시작하였다. 글씨를 잘 쓰든 못 쓰든 개성을 지닌 필체로 쓴 글씨는 저마다의 얼굴 생김새처럼 사랑스럽다. 그러나 손글씨 쓰기는 어렴풋한 옛날의 문화가 되고 있다. 손글씨 문화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대다수 사람에게 사용 빈도는 매우 미약하다. 손으로 펜을 쥐고 자기만의 필체로 글씨를 쓰는 것은 이제는 자판을 두드리는 업무의 보조적 수단에 불과하다.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다양한 필기도구로 글씨 쓰기를 즐기는 이들이 있다. 만년필을 쥐고서 노트에 깔끔하게 사각사각 글씨를 쓰는 멋은 자판을 두드리는 것과는 감각이 다르다. 필체가 좋든 좋지 않든 그래도 거기에는 자기만의 개성이 있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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