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세월 품은 비밀의 정원, 길손을 반긴다 [김선미의 시크릿가든]
시냇물을 건너니 낙원이었다. 차밭을 품에 안은 월출산 옥판봉 기세가 상쾌했다. 이런 세상이 있었나. 전남 강진군 백운동 원림(園林)은 그야말로 비밀의 정원이었다. 다산 정약용과 친구들이 은거와 유배의 삶에서도 땅을 읽어 자리를 잡고 경관을 즐긴 기상이 깃들어 있었다. 해남에서는 고산 윤선도의 정신을 따르는 정원 문화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곧 개장을 앞둔 ‘산이정원’은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척박한 간척지에 정원 도시를 만드는 꿈을 담고 있다. 생명의 혼(魂)이 깃든 강진과 해남 비밀의 정원에 다녀왔다.
●다산도 반한 백운동 원림
백운동 원림 주변에는 월출산에서 발원한 시냇물이 흐른다. 초록 이끼를 포근하게 덮은 돌 위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가면 정원 담장 앞에 다다른다. 한국 정원의 야트막한 담장은 볼 때마다 참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릴 건 적당히 가리면서도 내부를 드러내 방문객을 편안하게 해 주는 환대다.
담장 아래에는 자그맣게 네모난 구멍이 파여 있다. 정원에 들어서면 구멍의 쓸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구멍으로 바깥 물이 들어와 정원 안 기다란 수로와 네모꼴 연못을 거쳐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것이다.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한 다산 정약용은 당시 백운동 주인이던 이덕휘와 교류하면서 백운동 12경(景)을 노래하고 초의선사에게 그림을 그리게 해 20쪽짜리 시화첩 ‘백운첩’을 남겼다. 이 책에서 다산이 꼽은 백운동 제5경이 유상곡수(流觴曲水)다. ‘담장 뚫고 여섯 굽이 흐르는 물이 고개 돌려 담장 밖을 다시 나간다. 어쩌다 온 두세 분 손님이 있어 편히 앉아 술잔을 함께 띄우네.’ 다산, 초의, 남종화 대가인 소치 허련 등이 이 정원에 모여 학문을 논하고 예술을 즐겼다.
백운동 원림은 담양 양산보 소쇄원, 완도군 보길도 윤선도 부용동과 함께 호남 3대 정원으로 꼽힌다. 조선 중기 이담로가 1660년대에 조성한 후 대대로 장손이 물려받아 살면서 가꾸고 있다. 2012년 제12대 백운동 주인이 된 이승현 씨(65)가 2015년에야 이 정원을 일반에 개방했으니 그전까지는 정말로 비밀의 정원이었다. 2019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이 됐다.
●고산의 정신이 담긴 정원 문화
해남은 천혜의 풍광과 더불어 차(茶)와 걷기 같은 정원 문화가 두루 발달한 곳이다. 3월 초 황토와 청보리가 어우러진 해남 들녘은 생명의 기운이 가득했다. 달마산 기암절벽 위 신비로운 암자인 도솔암을 향해 걸어보았다. 미황사에서부터 능선 따라 올라가도 되지만 도솔암 주차장에서 30분 정도 걸어도 다다를 수 있다. 바위 병풍이 화창한 날씨를 만나 바다 전망과 어우러지니 이곳이 왜 해남 제1경인지 알겠다. 도솔암이야말로 진정한 암석원(rock garden)이었다. 도솔암 오가는 길에 ‘봄 처녀’라는 꽃말을 가진 토종 꽃 산자고와 봄까치꽃을 만나 반가웠다.
해남읍 연동리에 있는 고산 윤선도 고택 사랑채인 녹우당은 효종이 고산에게 내려준 경기 수원의 집을 현종 9년(1668년)에 해남으로 옮겨온 것이다. 해남 윤씨 19대 한경란 종부에 따르면 고산의 고조부 어초은 윤효정이 지었던 원래 집터에 사랑채를 옮기다 보니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을 이루게 됐다. 어초은 사당 옆에는 동백꽃이 피었고, 뒷산에는 500년 넘은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이 우거졌다. 사물의 이치를 탐구해 지혜에 이르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고산은 정원에 구현했다. 담장 옆 매화 향기가 너무도 은은해 한참동안 발을 뗄 수 없었다.
해남에서 발견한 새로운 비밀의 정원은 두륜산 자락 ‘설아다원’이다. 차 마시며 힐링하는 젊은 감성의 한옥 스테이 뒤편으로 3만3000㎡(약 1만 평) 규모 유기농 차밭 정원이 펼쳐진다. 녹나무, 삼나무, 소나무가 둘러싼 그림 같은 풍경이다. 방문객이 찻잎을 직접 따서 덖으며 차를 만들어 볼 수 있다. 프랑스 쇼몽 가든 페스티벌에 온 듯 정원에 위트와 철학을 담은 ‘포레스트 수목원’, 호수와 정원 산책로가 호젓한 해남 민간 정원 1호 ‘문가든’도 들러보자.
●미래 세대를 위한 ‘산이정원’
이제 새로운 명소를 여행 리스트에 올려야 한다. 해남군 산이면 구성리에 5월 초 문을 여는 산이정원이다. ‘산이 정원이 된다’는 뜻을 담은 정원형 식물원이다. 30여 년간 경기 가평 아침고요수목원을 일군 이병철 산이정원 대표(서남해안기업도시개발 부사장)가 새로운 경관을 만들고 있다. 2025년까지 조성할 52만3000㎡(약 16만 평) 중 16만5000㎡(약 5만 평)가 이번에 문을 연다.
산이정원은 보성그룹, 전남도, 전남개발공사 등이 세운 특수목적법인(SPC) 서남해안기업도시개발의 ‘솔라시도(태양을 뜻하는 solar와 바다를 뜻하는 sea의 합성어)’ 프로젝트 중 하나다. 솔라시도는 민간이 이끄는 국내 최대 규모 신(新)환경 스마트시티 사업이다. 산이정원은 이 도시의 상징이 될 예정이다.
미리 가본 산이정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바닷물이 호수가 된 물이정원이었다. 시냇물을 지나 백운동 원림에 들어서듯 호수를 건너 미래 세대를 위한 공간에 들어서게 된다. 물이정원에는 어른들의 잃어버린 꿈과 아이들이 찾는 꿈을 동시에 담은 이영섭 작가의 ‘어린왕자’ 작품도 설치돼 있다.
산이정원은 정원이 어떻게 생태와 미래를 담아야 하는지 보여준다. 일년초로 화려한 꽃밭을 꾸미는 게 아니라 여러해살이 야생화와 수목으로 사계절 지속 가능한 아름다움을 전한다. 높은 곳에서 조망하면 나무들이 해남향교에서 문양을 딴 연꽃과 붉은 홍가시나무 형태를 이룬다. 사이프러스를 죽 심어 이탈리아 토스카나 정원을 연상시키는 드넓은 ‘하늘마루 정원’에서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다.
산이정원은 정원도시포럼과 손잡고 기후위기를 비롯한 미래 이슈에 대응하는 정원 도시를 모색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탄소 저감나무 2050그루를 기부받아 심은 ‘약속의 정원’, 청띠제비나비 서식처인 후박나무 군락지를 보존해 명상을 이끄는 ‘나비의 숲’, 인생 최고의 서약을 위한 ‘웨딩 가든’…. 언덕 위 커다란 동백나무는 마을의 어르신이 100여 년 전 선조가 후손을 위해 심어주신 뜻을 담아 정원 측에 전달했다.
우리 정원의 원류와 미래를 함께 본 여행이었다. 땅을 잘 읽어내 한국의 아름다움을 물려주는 백운동 원림과 녹우당의 정신을 산이정원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바닷물 염분을 차단해 간척지의 기적을 이뤄내는 산이정원에서 동박새 소리를 듣고 오색기린초와 바위솔을 보았다. 그 작은 생명체들이 참 귀하고 감사했다.
●강진과 해남 별미 |
⓵다산밥상=강진 대표 관광지인 사의재 주모가 차려주는 아욱된장국과 바지락전 맛집. ⓶원조 해남고구마빵 피낭시에=해남 대표 특산물 해남고구마 모양과 색깔을 그대로 살린 빵이 인기인 곳. ⓷해남 성내식당=된장 육수 한우 샤부샤부 전문점. 반찬으로 나오는 김국이 별미. ⓸땅끝정인숙칼국수=진한 국물에 도톰한 면이 어우러진 팥칼국수와 동지죽이 유명한 해남 맛집. |
강진·해남=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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