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발레리나’ 서울 공연을 許하라 [핫이슈]

김병호 기자(jerome@mk.co.kr) 2024. 3. 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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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29일 러시아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린 유니버설발레단 ‘라 바야데르’ 기자간담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세계 3대 국제 음악경연대회 중 하나인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지난해 한국인 3명이 바이올린과 첼로, 성악(테너)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킨 나라에서 열린 대회라서 그런지 역대 최고 성과를 내고도 국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한 미국과 유럽 연주자들의 보이콧 속에 흥행되지 못한데다 또 다른 이유로 행사 자체가 권위를 잃었기 때문이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주최 측인 러시아가 전범 국가라는 이유로 2022년 4월 유네스코 산하 국제음악경연대회 세계연맹(WFIMC)으로부터 회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당시 WFIMC는 “야만적인 전쟁과 잔혹한 인명 피해 앞에서 러시아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아 선전 도구로 쓰이는 콩쿠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여파는 우리한테도 미쳐 지난해부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수상하면 군복무 시 예술·체육요원(보충역)에 편입될 수 있는 국제예술경연대회 목록에서 제외됐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 예술인들은 국제대회 참여가 거부되는 수난을 겪고 있다. 전쟁을 지지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냥 러시아 출신이기 때문에 배제되는 경우도 흔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가까운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전쟁 직후 독일 뮌헨 필하모닉의 수석지휘자 직에서 해고됐다. 뉴욕 카네기홀에서 빈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일정도 취소됐다. 협연을 앞둔 러시아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는 연주 전날 취소 통보를 받았다. 마추예프를 대신해 마침 뉴욕에 있던 조성진이 투입돼 환호를 받았다. ‘러시아 음악 차르’로 통하는 게르기예프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을 지지하고 푸틴과 친분을 과시하면서 서방의 미움을 샀다.

2017년 7월 러시아를 순방 중인 박원순 시장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을 방문해 발레리 게르기예프 총감독 겸 예술감독에게 ‘1대 서울 글로벌 대사’ 위촉패를 전달하고 있다.
최근 ‘푸틴의 발레리나’로 불리는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의 다음달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을 놓고 시끄럽다.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은 성명까지 내고 반대를 외치고 있다. “침략국 공연자를 허용하는 것은 러시아의 부당한 침략을 정당화하고,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경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하로바는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루츠크 출신이지만 마린스키(상트페테르부르크)와 볼쇼이(모스크바) 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를 지내며 러시아 국적자로 살아왔다. 여당인 통합러시아당 의원과 국가예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전쟁을 지지하는 등 푸틴과 가까운 문화계 인사 중 한 명이다.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활약하던 자하로바를 유럽 무대에 소개한 인물이 영화 ‘백야’ 주인공인 소련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다. 미국 공연 중 망명한 바리시니코프는 자하로바가 2001년 파리 오페라 발레단과의 협연을 주선해줬다.

우리가 전쟁 당사국도 아닌데 자하로바 같은 일류 무용수 공연까지 막는 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다. 냉전 시대에도 소련 예술인들은 미국과 유럽에 가서 공연을 펼쳤고, 소련 당국은 바리시니코프 같은 망명을 막기 위해 애를 썼다. 한편 1958년 러시아 예술의 위대성을 알리고자 시작한 제 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은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에게 돌아갔다. 당시 소련 심사위원들은 시베리아 감옥행을 각오하고서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실력이 뛰어난 클라이번에게 우승 메달을 줄 수밖에 없다고 보고했다.

냉전 시절 적국에서 승전보를 갖고 귀국한 클라이번은 카퍼레이드를 받으며 영웅이 됐다. 그를 기념한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가 만들어져 2022년 토종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18세로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다. 만일 클라이번이 소련 입국이 금지됐거나 콩쿠르에서 성과를 내지 못했다면 임윤찬의 성공담도 없었을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겉으로는 냉전이었지만 안에서는 문화 교류로 가까워질 기회를 찾고 있었다.

지금 서방은 그때와 달리 전쟁을 이유로 러시아 예술인들에게 빗장을 걸어잠그고 있다. 하지만 우리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 통에 러시아와 사이가 급격히 나빠진 지금, 그것을 조금이나마 개선할 수 있는 소재는 문화다. 더욱이 푸틴과 가까운 무용수라면 그녀의 서울 공연을 진행해 러시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러시아 국기를 달고 뛰는 국가대표 경기도 아니다. 만일 우리가 공연을 금지한다면 러시아 당국은 불쾌함과 섭섭함을 느껴 다른 분야에서 보복할 수도 있다. 공연 하나 때문에 양국 관계를 더 멀어지게 하고, 다른 위험을 초래한다면 소탐대실(小貪大失)일 것이다. 이번 공연을 통해 러시아 문화를 존중한다는 신호를 줌으로써 한-러 관계 회복의 작은 단초를 찾게되길 기대한다.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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