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군함전쟁’ 끝판왕, 정기선이냐 김동관이냐
국내 조선업체인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한화오션은 지난 4일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와 관련된 군사기밀 유출 과정에서 HD현대중공업의 임원이 개입된 정황을 수사해 처벌해 달라고 경찰에 고발했다.
지난달 27일 방위사업청은 HD현대중공업을 대상으로 연 계약심의위원회에서 이 회사 임원이 군사기밀 유출에 개입한 것이 객관적 사실로 확인되지 않는다며 입찰참가자격을 제한할 수 없다고 의결했다. 이 결정으로 HD현대중공업은 KDDX 사업 입찰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앞서 HD현대중공업 직원 9명은 KDDX 등과 관련한 군사기밀을 방위사업청과 해군본부에서 몰래 취득해 회사 내부망을 통해 공유하는 등 군사기밀보호법을 위반한 혐의로 2022년 11월 유죄 판결이 확정됐다. 방위사업법에 따른 청렴 서약 위반은 청렴서약서를 제출한 회사 대표나 임원의 개입이 확인되어야 성립 가능하다. 방위사업청은 대표나 임원의 개입이 객관적 사실로 확인되지 않아 제재 처분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한화오션은 자신들이 실질적 피해자라며 당시 군사기밀 유출에 현대중공업 임원의 개입 여부를 확인해달라는 내용을 담은 고발장을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제출했다. 한화오션은 2013년 대우조선해양이 KDDX 개념설계보고서를 작성했는데 HD현대중공업이 이를 유출해 사업에 활용했다고 주장한다. 한화오션은 지난해 자신들이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했으므로 유출된 개념설계에 자신들의 기술력과 영업비밀이 담겨 있어 피해를 봤다고 주장한다. 한화오션은 최근 연달아 기자 설명회를 열어 “중대한 범법 행위”란 표현을 써가며 HD현대중공업에 대한 전방위 공세를 펴고 있다.
대응을 자제하던 HD현대중공업도 한화오션의 공세가 이어지자 공식 대응에 나섰다. 한화오션이 방위사업청의 결정을 문제 삼을 아무런 법적 권한이 없으며, 사업개념이 2018년에 새로 정립돼 2013년 작성한 개념설계는 활용할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과거 한화오션이 더 심각한 군사기밀을 유출한 적이 있다며 “×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 “누가 더 큰 도둑이냐”라고 역공도 펴고 있다.
라이벌 관계인 국내 기업들이 소송을 벌이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이번 한화오션처럼 공개적으로 경쟁사를 격렬하게 공격하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방위산업은 고객이 정부이고, 정부가 업체를 강력하게 통제해왔기에 더 이례적이다. 그동안 정부는 업체 간 분쟁이나 갈등이 있을 때 주도권을 쥐고 조정·통제했다. 업체들도 정부 결정에 따랐다. 한화오션은 ‘정부(방위사업청) 결정에 반기를 들었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HD현대중공업의 입찰을 허가한 방위사업청에 관한 언급은 삼가는 중이다.
왜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정면 충돌했을까.
무엇보다 돈 때문이다. 한국형 차기구축함 KDDX 사업은 6000톤급 이지스함 6척을 건조하는데 총 사업비가 7조8천억원이다. 국내 조선업계에서 한국형 차기 구축함 건조 능력을 갖춘 곳은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 뿐이다. 수주한 업체가 향후 국내 군함 사업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만큼 양사 모두 사활을 건다. 군사기밀 유출 과정에 HD현대중공업 임원이 개입한 사실이 확인되면 이 업체는 최소 6개월에서 최대 5년까지 입찰 자격이 제한된다. 반대로 한화오션은 국내 군함 건조 시장을 독점할 수 있다.
HD현대중공업 처지에서 입찰 제한은 국내 시장뿐만 아니라 국외 시장에도 치명타다. 중대한 불법 행위로 자국 시장에서 수년간 퇴출된 조선 업체에 외국 정부가 군함 건조를 믿고 맡길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은 국외 군함 수출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예고하고 있다. 두 업체 모두 잠수함 수출에 관심이 큰데, 캐나다(8~12척, 70조~80조원 규모), 폴란드(2~3척, 5조원 규모), 필리핀 (2척, 3조원 규모) 등이 새 잠수함을 도입하려고 한다.
두 회사는 해외 군함 유지·보수·정비 사업 분야에서도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미국은 본토에서 해군 함정을 유지·보수·정비할 수 있는 물량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우방국 조선업체에 자국 군함의 유지 보수 정비업무를 위탁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카를로스 델 토로 미국 해군성 장관이 두 업체를 모두 방문해 국내 조선소의 군사적·상업적 역량을 확인하고 협력 가능성 등을 점검했다. 정기선 HD현대 부회장은 카를로스 델 토로 장관과 만나 회사의 함정 사업 현황과 기술력을 직접 소개하고 협력 강화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지난해 7월 한화그룹이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자, 방산분야 육해공 통합 시스템을 갖춰 글로벌 기업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한화가 K-9 자주포, 다연장 로켓 ‘천무’ 등 지상 무기에 치우쳤던 방산 사업 영역을 확대 재편하려는 구상의 일환으로 지난해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했고, 이를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3세대 경영인으로 분류되는 정기선(42) 부회장과 김동관(41) 부회장은 나이도 비슷하고 서로 결혼식에 초대할 정도로 평소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KDDX 사업이 양쪽 오너 3세의 경영능력을 입증하는 무대로 주목받으며 두 사람 모두 물러서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이번 충돌에는 1980년대 현대중공업과 대우중공업 시절 때부터 형성된 오래된 라이벌 관계도 자리잡고 있다. 1996년 한국형 구축함(KDX-2) 사업을 두고 현대중공업과 대우중공업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자 국방부는 두 업체를 교대 선정하는 방식으로 물량을 3척씩 나눠 과열을 막았다. 2001년부터 건조된 이지스구축함도 대우조선해양과 현대중공업이 나눠 건조했다.
현대와 대우는 1980년대, 1990년대 해군 잠수함 사업(1200톤급 209급)을 두고도 정면 충돌한 전사가 있다.
정주영 현대 회장이 1986년 잠수함 사업에 먼저 착수했는데, 김우중 대우 회장이 뒤늦게 뛰어들었다. 잠수함 사업이 두 사람의 자존심 대결로 비화했다. 이 대결의 승자는 대우중공업이었고, 당시 정주영 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현대는 1975년 한국 최초의 국산 전투함인 울산함 개발을 시작으로 국내 ‘조함자립’의 선구자란 자부심이 강했던 터였다. 209급 잠수함은 1992년 초도함이 진수되고 2001년까지 총 9척이 건조됐다.
1990년대 중반 해군이 잠수함 전력 증강사업에 착수하자, 현대와 대우는 다시 충돌했다. 다음 잠수함 사업 방향을 기존 209급 잠수함 성능 개량으로 잡으면, 기존 사업자인 대우중공업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고 수의계약도 가능했다. 대우중공업은 차기 잠수함 사업은 209급의 연장선인 개량 사업이라고 주장했다.
10년을 기다려온 현대중공업 처지에선 성능 개량이 아닌 신규 사업이어야 기회를 노릴 수 있었다. 현대중공업의 처지는 다급했다. 당시 일반 선박 건조는 인건비가 싼 중국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세계 조선업계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으려면 어려움의 정도가 매우 큰 잠수함 건조기술을 확보해야 했다. 차기 잠수함 사업마저 대우에 넘어가면 잠수함 기술을 따라잡을 수 없게 되고, 경쟁에서 뒤처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현대와 대우의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면서 김영삼 정부는 차기 잠수함 사업에 대한 의사 결정을 하지 못했다. 의사 결정은 김대중 정부로 넘어갔다. 1998년 12월 국방부는 차기 잠수함 사업에 경쟁입찰 방식을 도입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우는 선정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2000년 11월 법원에 계약체결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그러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국내 잠수함 건조는 대우조선해양과 현대중공업이 나눠 맡았다. 214급(1800톤급) 잠수함 총 9척 가운데 1·2 ·3 ·5·7·9 번함은 현대중공업이, 4·6·8번함은 대우조선해양이 수주했다. 이 과정에서 국방부는 의사 결정을 제 때 못하고 업체 갈등에 끌려 다녔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런 전례 탓인지 이번 KDDX 군사기밀 유출을 둘러싼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의 갈등에 국방부, 방위사업청은 보이지 않고 나서지도 않고 있다. 기업 간 다툼에 끼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역력하다.
방위산업은 국가안보에 직결되는 사안인 만큼, ‘공익의 수호자’로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시장의 자유’에만 맡겨두면 30~40년전 잠수함 사업 때처럼 정부가 업체의 이해관계에 끌려다니게 되고 한국형 차기 구축함 사업도 표류하기 십상이다. 정부가 사업 기준과 방침을 정리해 소모적 갈등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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