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23. 섬에 주민을 이주시키고, 군사를 배치하소서

최동열 2024. 3. 8.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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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들의 침략과 왜구들의 준동으로 피폐해 진 울릉도에 다시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군사들을 보내 지키게 하자는 건의도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물론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도백인 감사가 이 같은 주청을 했다면, 당시 강원도 관리와 주민 가운데 울릉도를 살만한 땅으로 인식하고, 적극적인 이주 정책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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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여전도(堪輿全圖)’ 강원도. 조선 후기 지도로 강원도 별도(別圖)에 울릉도와 독도를 그려 넣었다. 울릉도 아래 독도는 우산도(于山島)로 표기돼 있다.(독도박물관 소장)

■주민 쇄환(刷還) 후 다시 이어지는 울릉도 이주 건의

-‘현·읍(縣·邑)설치하고 군사를 배치하자’

-세종, ‘왜노(倭奴)’들이 대국(大國)의 땅 이라고 여기도록 방비하라’

왜구들이 극성을 부리는 등 동해바다의 혼란이 민생을 해치자, 조선은 태종 때부터 섬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육지로 나오도록 하는 조처를 하지만, 섬사람들을 육지로 불러냈다고 해서 섬을 방치해 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조선은 왜구들이 섬을 점거하지 못하도록 지속해서 관리를 보내 섬의 사정을 살피도록 했다. 이는 울릉도와 독도 등 동해상의 도서(島嶼) 지역이 ‘조선령’이라는 것을 인지시키는 것과도 맞물려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강원감사 유계문(柳季聞)이 무릉도(武陵島)의 우산(牛山)에 백성을 이주케하고, 수령을 두어 지키게 하자는 상소를 올린 것이 실록에 기록돼 있다.(세종실록, 세종18년 윤6월 갑신조/국사편찬위원회)

여진족들의 침략과 왜구들의 준동으로 피폐해 진 울릉도에 다시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군사들을 보내 지키게 하자는 건의도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그 같은 건의를 한 주인공들은 당시 강원도 동해안 일원과 울릉도의 사정을 잘 아는 관리들이었다. 먼저 세종 18년(1436년)에는 강원 감사가 울릉도에 주민과 군사들을 이주시키는 적극적인 정책을 쓸 것을 조정에 요청한다. 당시 강원감사 유계문(柳季聞)은 ‘무릉도(武陵島)의 우산(牛山)은 토지가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하며, 동서남북으로 각각 50여리 연해(沿海)의 사면에 석벽(石壁)이 둘러 있고, 선박이 정박할 만한 곳도 있사오니, 백성들을 모집해 섬을 채우고(옮겨가 살게 하고) 만호(萬戶)와 수령(守令)을 두어 지키게 한다면 오래도록 쓸 만한 장구지책이 될 것’이라고 상소문을 올렸다.

물론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도백인 감사가 이 같은 주청을 했다면, 당시 강원도 관리와 주민 가운데 울릉도를 살만한 땅으로 인식하고, 적극적인 이주 정책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고을을 신설하고 수령을 두는 것은 어렵다고 해도 매년 사람을 보내 섬 안을 살핌으로써 왜노(倭奴)들이 대국(大國)의 땅 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라고 세종이 하교한 내용( 세종실록, 세종19년 2월 무진조/구가편찬위원회)

영민한 군주였던 세종은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강원감사 유계문의 주청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자 이를 윤허하지 않으면서도 울릉도에 대한 관리만큼은 소홀히 하지 말라고 감사에게 당부한다. 세종은 1년 뒤 유계문에게 전지를 내려 ‘만일 왜노(倭奴)들이 섬을 점거한다면 장래의 근심을 알 수 없게 된다. 고을을 신설하고 수령을 두어 백성을 옮겨 채우는 것은 사세로 보아 어렵다고 해도 매년 사람을 보내 섬 안을 살피거나 혹은 토산물을 채취하고, 말(馬)의 목장을 만들면, 왜노들도 대국(大國)의 땅이라고 여겨 반드시 몰래 점거할 엄두를 내지 않을 것’이라고 하교하는 내용이 또한 실록에 전한다. 백성들을 섬에 옮겨 살게 하는 것은 수로가 멀고 험한 데다, 전쟁 등 유사시에 섬 백성들을 보호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수용하지 못한다고 해도 대마도 등지의 왜인들이 대국(조선)의 땅이라고 여기도록 섬을 탐색하는 일은 게을리하지 말라고 전교한 것은 섬에 대한 확실한 수호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킬 것을 주청하는 상소는 세조 때에도 이어진다. 세조 3년(1457년) 강릉부사(江陵府使)를 역임한 전 중추원 부사(副使) 유수강이 우산도(牛山島)와 무릉도(茂陵島)의 두 섬은 토지가 비옥하고, 곡식의 생산이 다른 지역보다 10배나 되니 읍(邑)을 설치할 만하다고 상소를 올린다. 유수강은 상소에서 울릉도까지 가는 물길도 자세히 언급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즉, 삼척(三陟)에서 섬(울릉도)에 도달하는데, 서풍(西風)이 곧바로 불어온다면 축시(丑時·오전 1시∼3시)에 배가 출발하여 해시(亥時·밤 9시∼11시)에 도착할 수가 있고, 바람이 살살 불어도 노를 사용한다면 하룻낮 하룻밤에 도착할 수가 있으며, 바람이 없어도 노를 사용한다면 또한 두 낮 하룻밤이면 도착할 수가 있다’며 ‘현읍(縣邑)을 설치하고 이를 지키게 하는 것이 좋다’는 뜻을 밝힌다.

▲ 강릉부사(江陵府使)를 역임한 전 중추원 부사(副使) 유수강이 우산도와 무릉도에 현읍(縣邑)을 설치하고 지키도록 하자고 상소한 내용(세조실록, 세조 3년 4월 기유조/국사편찬위원회)

물론 이 같은 건의는 그대로 수용되지는 않았으나 섬을 적극적으로 개척해야 한다는 이들의 의견은 조정에 울릉도의 존재 가치를 전하고, 지속적 관리 필요성을 일깨우면서, 후일 수토관 파견과 개척령 반포 등 적극적 관리의 밑거름이 됐다는 점에서 그 무게를 가볍게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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