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초유의 '인술 파동'…"유신에도 협상은 있었다"

유영규 기자 2024. 3. 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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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서울의대를 찾아 수련의 파업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한 김종필 국무총리와 민관식 문교부 장관

정부와 의료계가 의사 증원을 둘러싸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대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양측 모두 국민을 최우선시한다고 말하지만, 갈수록 커지는 국민의 피로감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과거 사례를 통해 의료계와 정부의 뿌리 깊은 갈등을 조명해 봤습니다.

국내에서 임상수련 과정 중인 인턴과 레지던트들이 대규모로 파업한 첫 사례는 지금으로부터 53년 전인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국에 미국식 전공의 수련 제도가 처음 도입된 게 1958년이니, 불과 13년 만에 전공의들이 파업이라는 초강수를 뒀던 셈입니다.

더욱이 당시는 박정희 정권의 위세가 '서슬 퍼런' 시기였습니다.

학술지 '역사문제연구'에 지난해 발표된 논문(1971년 수련의 파업: 1960~1970년대 의료 인력에 대한 국가통제 강화와 의사사회의 반발)을 보면, 전국 수련의들의 동맹 파업은 당시로서는 초유의 사태였습니다.

저자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정준호 전임연구원은 이 당시 수련의들이 의사인 동시에 피교육자라는 모호한 위치에서 장시간 노동과 불합리한 처우를 감수해야 했던 게 파업의 근본 원인이 됐다고 진단했습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수련의들에게 적절한 보상은커녕, 해외여행 제한 조치 등을 통해 이들을 더욱 강력하게 통제하려 했습니다.

명목적으로는 국내 면 단위의 44%가 무의촌인 상황이니, 최소 1년간의 무의촌 근무를 마쳐야 해외여행 허가를 내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해방 후 의학교육의 변화와 졸업 후 교육제도의 정착으로 전문의 배출이 늘었지만,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병원이 적어 미국에 진출하는 부작용이 늘어나자 수련의들에게 해외여행 제한이라는 고육책을 내놓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심각했던 의사들의 해외 인력유출은 현재 필수의료를 기피하는 현상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서울의대의 경우 1958년부터 1971년까지 의대 졸업생 중 40~60%가량이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국립의료원에서는 1965년에 2명을 제외한 인턴 모두가 미국 의사로 취업해 인턴을 재모집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이러한 대응책은 오히려 수련의들의 전면적인 반발로 이어졌습니다.

맨 처음에는 1971년 6월 국립의료원 수련의들이 봉급 인상과 함께 신분 보장을 요구하며 사표를 제출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경호 보건사회부 장관이 "식모가 집을 나가도 때를 보아서 나가는 법인데 의사가 그럴 수 있느냐"는 강경 발언을 내놓으면서, 오히려 전국 대학병원 수련의들이 대부분 참여하는 파업으로 사태가 악화하는 도화선이 됐습니다.

사태가 커지자 보사부가 의료인의 해외여행 조건 완화와 처우 개선 등의 조치를 내놓으면서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듬해 예산편성에 수련의 처우 개선에 대한 예산이 전부 삭감됐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수련의들이 다시 사표를 제출하는 2차 파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에 정부가 특정 시한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사표를 모두 수리하고 즉시 징집하겠다는 강경 방침으로 맞선 것 역시 현재 상황과 매우 유사한 부분입니다.

지금과 다른 부분은 그래도 협상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 싸움에서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정부였습니다.

1971년 9월 8일 보사부가 수련의 제도의 모순을 일부 인정하고 대안을 제시하자 수련의들도 복귀를 결정했습니다.

복귀가 결정된 9월 11일에는 김종필 국무총리가 직접 서울의대를 찾아 "미봉책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이에 따른 변화는 장기간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유신 정권은 1972년에 조직된 집단행동을 제한하는 조치로 이전과 같은 파업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1977년에는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해 병원과 의사들을 국가의 통제 대상에 편입시켰습니다.

보건의료체계로만 본다면 '사회주의 방식으로 운영되는 민주주의' 시스템이 이때 처음 만들어진 셈입니다.

정 연구원은 "한국 의사들은 수련의 파동을 거치며 인술(忍術)을 통해 '의권'을 일부 보호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를 직업공동체의 전문직업성을 기반으로 한 인술(仁術)로 전환하는 데 실패한 셈"이라며 "당시 한국 의료계가 가지고 있던 갈등과 모순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짚었습니다.

여기서 '인술'이라는 표현은 한국 전통의 유교관에 동서양의 의료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현대의 의료 윤리를 접합한 용어로 해석됩니다.

대한의사학지 논문(2023년)에서는 서양의학이 '조선'이라고 하는 지역과 민심에 녹아들어 가려는 방법의 하나로 의술 대신 '인술'을 채택해 사용한 것으로 봤습니다.

1971년 수련의 파동이 당시 언론에 '인술(仁術) 파동'으로 쓰인 것도 이런 까닭으로 읽히는 대목입니다.

물론 수련의들의 열악한 처우와 수련 조건에 대한 쟁점들은 그 이후에도 미완의 문제로 남아 내과 전공의 중심의 파업(2014년 하반기), 전공의 특별법 제정(2015년)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좀 더 넓게 보자면, 이번 사태의 배경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학술지 '역사문제연구' 논문 발췌, 연합뉴스)

유영규 기자 sbsnewmedi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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