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록에 대책 적혀’ 이유로…검찰, ‘노동자 사망’ 동국제강 불기소

이지혜 기자 2024. 3. 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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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서 지켜지지 않은 ‘문서 속 대책’
검찰, 안전조처 모두 이행했다고 판단
게티이미지뱅크

국내 3대 철강업체인 동국제강의 사내하청노동자가 2022년 3월 크레인 안전벨트에 몸이 감겨 숨졌으나 검찰이 대표이사의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에 최근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유족이 처벌을 요구했던 두번째 대주주이자 이사회 의장을 겸하고 있어 ‘진짜 사장’으로 불리는 또다른 대표이사도 함께 불기소 처분했다. 사고 당시 동국제강의 안전대책은 사실상 문서에만 존재하는 형식적 대책에 불과했지만, 검찰은 동국제강이 필요한 안전조치를 모두 이행했다고 판단했다.

7일 한겨레가 불기소결정서를 살펴보니, 대구지검 포항지청은 지난 1월30일 동국제강 대표이사 장아무개씨와 김아무개씨의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에 대해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과 관련해 유해·위험요인 확인 및 개선 절차를 마련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며 불기소 결정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2개월 차였던 2022년 3월 동국제강 포항공장 하청노동자 이아무개씨는 부품 교체를 위해 천장크레인에 올랐다가 갑작스러운 기계 작동으로 안전벨트에 몸이 감겨 숨졌다. 크레인 보수 작업 시 크레인 전원을 차단하라는 기본 수칙을 어겨 발생한 사고였다.

고용노동청은 1년여 수사 끝에 지난해 2월 동국제강의 ‘월급 사장’ 김씨를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 등으로 검찰에 기소의견 송치했다. 동국제강의 두번째 대주주이자 이사회 의장도 겸하는 또다른 대표이사인 ‘진짜 사장’ 장씨는 입건조차 되지 않자, 유족은 장씨를 직접 검찰에 고소했다. 이번에 검찰은 두 사람을 모두 불기소 처분했다.

해당 사고 발생 전에도 동국제강에서는 매년 1∼2명씩 사망사고가 발생해온 곳이지만, 검찰은 위험요인 확인 및 개선 절차가 모두 운영되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사고 발생 몇 달 전 원청 설비 담당자와 하청노동자가 참여한 회의에서 ‘작업 전 (크레인) 전원차단 실시’ 등 안전조치 사항을 논의한 사실이 회의록을 통해 확인된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사고 당시 현장의 모습은 검찰 판단과는 거리가 멀었다. 크레인 위에는 신호수가 없었고, 원청 안전관리자도 없었으며, 작업자들은 무전기도 받지 못했다. 당시 하청업체가 작성한 작업계획서상 안전대책을 봐도 크레인 보수시 필수 조치인 ‘크레인 전원 차단’은 아예 점검 항목에서 누락되어 있다. 사실상 위험 확인절차는 형식적 서류로만 존재하고 현장에서 전혀 작동하지 않았는데도 검찰이 경영책임자들에게 면죄부를 준 셈이다.

법원은 기업이 ‘실질적으로’ 의무를 이행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핀다. 직원 16명이 독성물질에 급성 중독됐던 두성산업 사건에서 법원은 “안전보건관리규정과 위험성평가 매뉴얼이 일반적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 사업장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경영책임자의 의무가 이행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바 있다.

검찰은 동국제강 사고가 법 시행 두달만에 발생했다는 점도 불기소 근거로 삼았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재해대응매뉴얼을 만들고 실제로 지켜지는지 6개월마다 1회 이상 점검하도록 정하고 있는데, 법 시행 두달 밖에 지나지 않아 점검 의무가 당시 발생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앞서 검찰은 2022년 5월 울산 에쓰오일 공장에서 부탄가스 폭발로 하청노동자 1명이 사망하고 8명이 전신 화상을 입은 사건에서도 ‘6개월 내에 발생’했다는 이유로 경영책임자들을 무혐의 처분했다.

유족 대리를 맡은 권영국 변호사는 “중대재해처벌법은 매뉴얼 만들어서 본사 케비넷에 넣어두라고 만든 게 아니라, 매뉴얼이 현장에 이행되도록 하라는 의미”라며 “검찰이 이런 식으로 판단한다면 기업들은 사후적으로 서류 끼워맞추기로도 충분히 혐의를 벗을 수 있게 된다. 수사에 대응할 능력이 되는 대기업에만 유리한 구조”라고 비판했다. 유족은 장씨에 대한 불기소처분에 불복해 이미 항고를 제기한 상태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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